'아름다운' 얼굴 대신 '개성있는' 얼굴로 변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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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아름다운 여자가 저만치에서 늙어 가는 걸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의 소회는 대충 어떤 모양일까.

무려 20년을 한국 미인의 대명사로 일관해 온 배우 황신혜가 중년이 되어 간다는 건 '너도 별 수 없이 늙는구나'하는 일종의 안도감, 혹은 고소함, 그리고 '너만은 그대로였으면 좋겠다'는 좀 색다른 안타까움, 뭐 그런 게 버무려진 묘한 맛일 듯싶다.

아름다운 대상은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에 달렸다. 그녀의 행적을 간단하게 추슬러 보니 놀랍게도, 이 영리한 여자는 '아름다운 얼굴은 배우가 되기 위한 한 가지 재료일 뿐'이라는 사실을 진작에 알아차린 듯하다.

보기 좋은 외양은 사실 장식품일 수 있다. 유행이 지난 장식품들의 행로는 뻔하다. 그녀가 기억의 창고에 갇히는 신세가 되지 않은 건 스스로 터득한 생존의 법칙, 즉 미모가 마모(磨耗)하기 전에 보이지 않게 순차적으로 변환 승부를 한 덕이었다.

서른 아홉은 나른한 일상으로 인해 권태의 길목을 기웃거릴 만한 나이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분주하다. 스스로도 서른이 넘으면 당연히 배우는 더 이상 못할 거라고 예감했다는 황신혜에게 이처럼 오래 가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항상 긴장을 안 풀고 살았죠."

긴장은 안 풀었지만 연기자로서 변신의 빗장은 거듭 풀었다. 1983년 '아버지와 아들'로 데뷔한 후 20년째 그런 작업을 반복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황신혜의 행보는 신중하다기보다 경쾌하다. 새봄에 시작되는 미니 시리즈 '위기의 남자'에서는 연하의 애인(신성우)과 남편(김영철) 사이에서 방황하는 중년의 주부를 연기한다.

촬영 중인 영화 '패밀리'에서는 형제(윤다훈·김민종) 조폭에 맞서는 당찬 성격의 룸살롱 마담 역을 맡았다. 멜로 드라마 몇편에서 주인공을 맡다가 결국 용도폐기될 운명이라 여겨졌던 그녀가 드라마 'c방각하''애인', 그리고 영화 '301 302'등 성격이 요구되는 배역을 거치면서 이제 확실하게 연기파로 변신한 것이다. 그녀의 절차탁마가 기특하고 대견하다.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를 연출할 때 그녀를 진행자로 기용했는데 속셈은 "그냥 가만히 서 있어도 괜찮기 때문"이라는 걸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녀는 정물처럼 가만히 서 있지 않았다. 첫 녹화가 끝나갈 무렵 그녀가 즉흥적으로 말한 "한 시간이 후딱 지났네요"라는 말이 PD들 사이에서 잠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녀의 비(非)계산적인 언어와 태도가 조용히 맘에 와 닿았다. 예나 지금이나 말이 막히면 그녀는 그냥 철부지 소녀처럼 웃는다. 옛날엔 그저 아름다운 여자의 특권이려니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녀는 웃으면서 대답을 궁리하는 듯하다. 그녀는 자의식이 대단하고 무엇보다 사고가 긍정적이다. "어렸을 때보다 지금이 좋고, 지난 해보다 올해가 좋아요. 올해보다는 내년이 좋을 거고요."

그녀의 이름을 딴 언더그라운드 황신혜 밴드는 '황당하고 신선하고 혜성 같은' 음악을 추구하고 싶어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연기자 황신혜의 끝없는 변신을 보노라면 이제 오히려 그녀가 황신혜 밴드의 브랜드 목표에 근접해 간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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