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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1. 가난과 영광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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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2002년은 내 영화 인생의 정점이었다. 콧대 높은 프랑스 칸 영화제를 드디어 정복했다.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임권택 감독(中), 정일성 촬영감독(左)과 수상의 기쁨을 함께 했다.

남자는 평생 세 번 운다고 한다. 태어날 때, 부모님이 세상을 떠날 때, 나라를 잃을 때-.

그러나 나는 눈물이 많다. 노래를 듣거나 부를 때 가사에 '어머니'만 들어가도 조건반사처럼 눈이 젖는다. 어릴 때 집을 나간 생모는 내가 가장(家長)이 돼서야 나타났다. 뱃고동 소리도 내 눈물의 씨앗이다. 가마니 석 장(하나는 깔고, 또 하나는 덮고, 나머지는 베개로 썼다)에 몸을 맡겼던 피란 시절의 부산항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밀가루 음식을 삼키지 못한다. 풀빵 몇 개와 물로만 14일을 버틴 기억이 식도를 조이기 때문이다.

감격에 찬 눈물도 있다. 영화 '춘향뎐' 얘기가 나오면 금세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수백 대의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그 빨간 카펫을 밟던 칸영화제의 광경이 오버랩 되는 것이다. 마침내 '취화선'으로 이 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이 감독상을 받았을 때의 감동도 눈물 없이는 떠올릴 수 없다.

임 감독과 나, 정일성 촬영감독은 한국영화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돼 버렸다. 그저 고맙고 황송할 따름이다. '세 노인네'가 우직하게 한길을 가는 모습을 밉지 않게 봐 준 덕분이다.

영화 제작자로 만 20년을 보내면서 서른여섯 편을 만들었다(이 중 11편이 임 감독 작품이다). 아무도 한국영화의 장래에 승부를 걸지 않을 때 과감히 '베팅'한 게 적중했다. 나는 '이건 이기는 게임'이라고 확신했고, 게다가 운도 따랐다. 돈은 크게 못 챙겼지만 적어도 명예는 얻었다.

"이 사장은 뭐 그렇게 안 해본 일이 없어요?" 임 감독은 종종 이렇게 묻는다. 내가 생각해도 공부만 빼고 다 해 본 것 같다. 주린 배를 채우려 15세에 부두 노동을 할 때만 해도 내가 문화훈장(은관)까지 받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처자식만 생각하며 발버둥쳐온 것 뿐인데 어느새 '성공한 인생'이 돼 있었다. 주제넘게 감히 '성공'했다고 말하는 건 그만큼 밑바닥 인생을 헤쳐 왔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결국 임 감독은 나를 모델로 올해 초 '하류인생'을 만들었다. 내 삶이 드라마틱하다고 보았던 것일까. 영화를 보고 주변에서 궁금해 하는 이들이 늘었다. 특히 명동의 '건달 시절'에 관심이 많았다. 암흑가 얘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나 매혹되는 소재이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나로서는 지우고, 묻어두고 싶은 기억인데도 말이다.

훗날 이회택.홍명보 선수 등을 배출한 '축구 명문' 동북고에서 나는 부동의 센터 포드였다. 대학에서 특기생으로 받아줬으나 수업료가 없어 포기하고 방황하는 데 '명동'에서 불렀다. 주먹 하나로 생계가 해결되니 따지고 재고 할 계제가 아니었다. 4.19와 5.16으로 세상이 바뀌면서 명동을 떴다. 일본 영화 '하나비'의 한 장면처럼, 내 보스는 쿠데타 세력의 총에 맞아 평생 휠체어 신세를 졌다. 국가적인 대단한 명분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가 가진 사업상의 이권을 뺏기 위해서였다.

이후 주한미군에 건설 군납을 하면서 정치권의 '더티한 모습'을 지긋지긋할 만큼 지켜봤다. 정치자금을 안 내면 사업을 따낼 수 없었고 기껏 냈는데도 꿀꺽 삼키고는 더 많은 돈을 낸 사람에게 권리를 넘기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딴따라' 영화계는 청정지역이라 할 만했다.

얼마 전 한 빌딩에서 차를 빼서 나오는데 주차원이 한사코 주차비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앞으로도 좋은 영화 계속 만들어 주세요"하면서 꾸벅 절을 하는 것이었다. 지방의 한 소도시에 갔을 때는 방을 못 구해 쩔쩔매는데 여관에서 일하는 여급이 알아보고는 숙소를 구해주기도 했다. 나는 무엇보다 사회에서 하찮은 취급을 받는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을 때 가슴이 뿌듯해진다. 내가 제작한 영화 '장군의 아들'의 모델인 김두한이 구두닦이나 술집 종업원 같은 하층 사람들의 영웅이었던 것처럼, 내 지금 모습이 그들에게 작은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겠다.

20년 전에 비하면 한국 영화계의 덩치가 엄청나게 커졌다. 그래서인지 옛날만큼의 재미는 없다. 남의 돈을 투자받아 영화를 만드는 건 내 체질이 아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틀어쥐어야 직성이 풀린다.

돌아보면 나는 참 인복이 많은 사람이다. 한국 영화를 사랑해 준 관객과 언론에 빚을 많이 졌다.'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쓰겠다고 결정한 것도 그들에게 내 '영화 인생'을 바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 필자 약력

-1936년 평안남도 평양 출생

-56년 서울 동북고 졸업

-64~74년 태흥상공주식회사 대표

-74년~현재 의정부 중앙극장 대표

-75년~현재 의정부 국도극장 대표

-78~79년 전국극장연합회장

-83~89년 〃

-83년~현재 태흥영화사 대표

-88~89년 한국영화업협동조합 이사장

-94~97년 한국영화제작가협회장

-98년~현재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 공동대표

◆ 주요 제작작품='어우동'(1985) '뽕'(86) '아제아제 바라아제'(89) '장군의 아들'(90) '젊은 날의 초상'(91) '서편제'(93) '화엄경'(93) '태백산맥'(94) '춘향뎐'(2000) '취화선'(2002) '하류인생'(2004) 등 총 3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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