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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세영 회장 ‘연 100만 대 생산’ 꿈, 그 꿈을 비웃던 영국 차는 지금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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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세영 전 현대자동차 회장이 1983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자동차박람회에서 현대차의 최신 모델앞에 서 있는 모습. [중앙포토]

1987년 영국의 BBC TV 방송국이 한국 경제와 관련된 특별 프로그램을 제작해 방영했다. 그 프로그램에는 현대자동차 사장이었던 고(故) 정세영 회장과의 인터뷰가 포함돼 있었다. 당시 나는 영국에서 팬더 카(Panther Car)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BBC 방송국이 한국 관련 뉴스에 인색했던 때라 그 프로를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BBC가 연 100만 대를 생산하는 것이 희망이라고 말하는 정 회장의 활짝 웃는 얼굴을 클로즈업해놓고 “현재 남아도는 것이 자동차 생산 시설과 생산량이라고 걱정하고 있는데…”라는 해설자의 비아냥 섞인 멘트로 인터뷰를 마무리한 장면이었다.

그 방송이 나간 지 23년이 지났다. 현대자동차는 지금 연 300만 대 이상을 생산하는 국제적인 자동차 회사로 발전했다. 그 덕에 우리나라는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국이 됐다. 지난해 미국의 저명한 자동차 잡지 ‘모토 트렌드’가 ‘제네시스’를 올해의 최고 차(Best Car of The Year)로 선정했을 만큼 현대차는 외국에서 호평받고 있다.

반면 영국의 사정은 다르다. 영국 자동차 회사는 해설자가 걱정한 대로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대부분 다른 나라로 팔려나가지 않았는가. 영국 자동차의 대명사나 다름없었던 재규어와 아프리카의 사파리 하면 제일 먼저 연상되는 랜드로버는 BMW에 매각됐다가 다시 미국의 포드사에 팔려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재규어와 랜드로버는 인도의 타타그룹에 인수돼 지금은 결국 인도 국적의 자동차가 됐다.

규모는 작지만 포뮬러 원(F1) 레이스에서 여러 번 우승을 기록한 경(輕)경기용 자동차를 디자인·생산해 명성을 얻은 오토 엔지니어링 회사 로터스는 현재 말레이시아의 국영 자동차 회사인 프로톤이 운영하고 있다. 오스카상을 수상한 영화 ‘Love Story’에서 주인공인 올리버가 몰고 다니던 MG-TD는 2인용 스포티(Sporty)카를 생산해 유명해진 MG 브랜드다. 이 브랜드 역시 지금은 중국 상하이차에 소속돼 있다. BMW가 인수할 때까지 30년 동안 조금도 디자인을 바꾸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고 또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처녀 시절 타고 다녔던 국민차 미니와 영국 왕실보다 더 귀족스러운 롤스로이스는 이제 BMW의 여러 모델 중 하나가 되면서 평범한 브랜드로 전락하고 말았다.

세련되고 도도한 상류층 사람이 선호했던 벤틀리는 독일의 국민차인 폴크스바겐이 흡수했으며 지금은 돈 많은 사람이나 타는 차의 브랜드가 됐다. 영화 ‘007’ 시리즈에 여러 번 출연해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고 또 유명해진 애스턴 마틴은 미국 포드사 소속이었다가 지금은 랠리 회사가 주축이 된 컨소시엄이 2007년 인수해 겨우 영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대부분의 영국 명품 차가 영국을 떠난 셈이다.

전통과 전설로 화려했던 ‘브리티시 카(British Car)’의 역사는 이제 브랜드만이 남아 유서 깊고 찬란했던 영국 자동차 산업의 자취를 짐작하게 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선 안 될 것은 영국 자동차의 발전은 영리를 목적으로 한 기업이 이룩한 게 아니고 자동차에 대한 열정과 모험심을 가진 개개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빠른 차에 매력을 느끼고 더 힘센 엔진 마력에 목말라 하는 모험가의 헌신과 노력이 영국 자동차 산업의 기반이 됐던 것이다. 그래서 기업은 망했지만 그래도 창업자의 이름은 남지 않았는가. 벤틀리 카의 벤틀리, 애스턴 마틴의 마틴, 롤스로이스의 헨리 로이스와 찰스 롤스, 로터스의 콜린 챕맨이 그랬다.

한국이 350만 대 이상의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다지만 자동차 산업의 영웅은 어디에 있을까.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국이라지만 우리나라의 자동차 문화는 어디까지 와 있는 것일까.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자문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과연 우리나라 자동차가 훗날 장인의 이름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을 말이다.

김영철 가야미디어 회장 (에스콰이어·바자·모터트렌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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