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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의 나는 이렇게 읽었다] 인도가 잠을 깰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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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든 자원이든 나라의 덩치가 경제 발전에 별 도움이 안 될 경우가 있다. 흔히 브릭스(BRICs)라고 불리는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이 그러했다.

반면에 날씬한 일본은 기술과 서비스로 세계 경제를 주름잡았고, 동아시아 ‘네 마리 용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사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브라질과 인도가 오랜 방황과 명상을 깨고, 러시아와 중국이 생산력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들이 제대로 덩칫값을 하면 세계 경제에 지진이 날 텐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주변에 여기 눈 돌린 사람이 별로 없다.

이에 희귀한 예외로 이장규·김준술 지음 『19단의 비밀: 다음은 인도다』(생각의 나무, 2004년, 239쪽, 9800원)가 나왔다. 얼핏 제목만 보면 셜록 홈즈류의 탐정 소설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두 저자가 오랜 기자 경력을 바탕으로 인도를 ‘정탐하고’ 펴낸 인도 경제 개관이다. 경제라고 했지만 감칠맛 내는 인도의 정치·사회·문화 분야의 삽화(揷話)들이 고루 들어 독서의 잔재미를 던져준다.

19단의 비밀? 그게 뭐 대수냐고 넘겨버릴 수도 있다. 예컨대 전자 계산기가 나오자 수판이 들어간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과연 그럴까? 사람이 기계를 만들지 기계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면, 기계를 만들어내는 사람의 ‘머리’가 좋아져야 계속 좋은 기계를 만들어내게 된다. 그렇다면 날렵한 계산기가 늙다리 수판을 미련없이 밀어낸 사회와, 쉬운 구구단 대신 어려운 19단을 일부러 배우는 사회의 장거리 경주는 어떻게 끝이 날까. 틈만 나면 떠벌이는 우리 교육의 장래를 이런 지혜에서 찾으면 어떨는지….

인도인은 자고로 수학과 논리에 뛰어났다. 일례로 0을 개발해서 아라비아로 수출한 것도 이들이다. 그런 연고 때문인지 인도는 근자에 부쩍 정보통신(IT) 산업의 소프트웨어 메카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일하는 인텔 직원의 17%, 마이크로소프트 직원의 20%, IBM 직원의 28%, NASA(미항공우주국) 직원의 32%가 인도인이라니 그 위세를 능히 가늠할 만하다. “가르치는 선생이나 배우는 학생이나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보다 우리가 수준이 나을 것”(36쪽)이라는 어느 인도공과대학(IIT) 교수의 지적은 다소 허풍일 수도 있지만 그 자부심이 놀라운 것은 사실이다.

인도에는 카레라이스가 없다. 인도에 처음 온 포르투갈 사람들이 음식을 가리키며 이름을 묻자, 가게 주인은 음식의 ‘건지’를 묻는 줄 알고 카리(kari)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카리가 일본 발음 필터를 거쳐 우리한테서 ‘카레’가 된 것이다. 식당에 가면 곰탕이나 자장면을 시키지 ‘음식’을 시키지 않듯이 인도에 가서도 카레 메뉴를 찾아서는 안 된다. 혹시 뭄바이니 첸나이니 콜카타니 들어보셨는가? 예전 지리 시간에 배운 봄베이와 마드라스와 캘커타가 이제 그렇게 불린단다. 힌두교 근본주의(Hindutva)가 세력을 넓히면서 ‘친영(親英) 청산’ 작업의 일환으로 지명을 고쳤다는데, 정작 영국 냄새가 풀풀 나는 뉴델리는 그대로 놓아두고 있으니 그들의 과거사 청산 속내가 자못 궁금하다.

사람은 굶어도 소는 먹는 나라가 인도였다. 그러나 이제 변화의 물결을 타고 사람도 먹기 시작했다. “잠자리에선 LG전자 에어컨을 틀어놓고…아침에 눈을 뜨면 주머니에 삼성전자의 최신형 휴대 전화를 챙겨 넣고…현대자동차의 소나타 승용차를 타고 회사로 출근한다”(215쪽). 요즘 인도인들이 가장 선망하는 생활상이 그렇단다. 10억 인구이니 시장 전망도 밝다. 장하준 교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가혹한 파고에 중국과 인도가 의연히 버텨준 것이 1960~70년대 ‘동아시아의 기적’을 이루는 한 요소가 되었다고 풀이했다. 한국 기업의 성공 사례 뒤에는 물론 피나는 현지화 노력과 숱한 시행 착오가 따랐다.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다. 한쪽에서는 정보통신 혁명 바람이 불지만 “핵탄두를 만들어 소달구지에 끌고 가는 나라가 인도라는 우스갯소리가”(102쪽) 나오기도 한다. “깨끗한 양심보다 더 푹신한 베개는 이 세상 어느 잠자리에도 없다”(69쪽)는 매출액 10억 달러의 어느 소프트웨어 회사 회장의 말처럼 정직과 투명성은 이들과 비즈니스의 강점이 된다. 그러나 전화 놓는 데 1년이나 걸리던 ‘인허가 왕국’의 오명이나 “정부의 일은 신의 일이다”(154쪽)라는 관청의 오만은 단연 경계할 대상이다.

8세기에 혜초는 천축(天竺)에서 불법을 얻어왔고 현대의 이장규 거사는 인도에서 19단을 배워왔다. 혜초의 인도 기행문 『왕오천축국전』은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가 중국 둔황(敦煌)에서 찾아낼 때까지 1200년을 석굴에 숨어 있었으나, 저자들의 책은 지금 서점에서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누가 또 아는가. 영어에 능하고 수학 잘하는 나라 인도의 ‘숙달된 조교들’이 국내의 과외 수업을 싹쓸이하고 입시 학원가를 점령할는지를!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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