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5277> 제100화 '환란주범'은 누구인가 <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1.1평의 좁은 감방 독실, 나는 온 힘을 다해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했다.

살아날 길이 없구나. 권력이, 검찰이, 언론이, 여론이 다 나를 잡으려는데 꼼짝없이 갇혔구나. 믿을 것은 오로지 나 하나뿐이구나.

내 기억에 의지해 모든 진실을 되살려 스스로 변론을 펼 수밖에 없구나. 다른 독방에 갇힌 강경식 전 부총리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1998년 5월 18일. 외환 위기가 구체화되기 직전인 97년 11월 19일 경제수석비서관 자리를 물러난 지 꼭 여섯달 만에 나는 강경식 전 부총리와 함께 소위 '환란 주범'으로 몰려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수인(囚人) 번호 785.

구속 한달여 전인 4월 4일 상도동으로 내가 모셨던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 뵈었다.

"현 정권이 외환위기 문제를 검찰이 다루도록 몰아가고 있는데, 이건 안됩니다. 앞으로 누가 정책 결정을 하겠습니까. 현 정권에도 큰 부담이 될 겁니다. 누가 DJ에게 얘기를 해야 하는데, DJ가 얘기를 들을 분은 각하밖에 더 있겠습니까."

金 전대통령은 묵묵부답이었다.

구속 된 뒤 우리(姜전부총리와 나) 사건 변호인단에 합류한 서정우 변호사팀과 첫 변호인 접견을 가졌을 때 徐변호사는 내게 물었다.

"기소 내용을 대체로 인정하고 형(刑)을 감면 받는 데 역점을 둘 겁니까, 아니면 전면 부인하고 끝까지 갈 겁니까."

나는 단호히 답했다.

"유능한 변호사인 당신이 이런 게 형사 사건이 된다고 봅니까. 나는 그 많은 공소 사실 중 단 한 건도 인정 안합니다. 확신이 없으면 변호를 맡지 마세요."

우리 변호사들은 훌륭했다. 그들은 확신을 갖고 변호에 임했으며, 99년 8월 20일 재판부는 '거의 대부분'의 기소 내용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그 1년3개월 동안의 재판 기록과 판결문 8천여 페이지를 나는 내 홈페이지(www.kiminho.pe.kr) 자료실에 다 올려놓았다.'거의 대부분'이 무죄라 한 까닭은 이렇다.

검찰은 姜전부총리와 나를 '직무유기 및 직권남용'으로 걸었다. 나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외환위기 예방 및 수습 기회 일실(逸失)''외환위기 상황 도래 사실 은폐''IMF 구제금융 요청 확정시기 지연'이었다. 애초부터 희한한 죄목들이었지만 결국 이 모두가 무죄라는 것이다.

다만, 한가지. 검찰은 외환위기의 본질과 직접 관계 없는 것 하나를 더 걸었다. 공소 유지를 위해. '해태 그룹 협조융자 관련 직권 남용'이다. 이에 대해서도 판결은 '자격정지 형(刑)에 선고유예'였다.

자격정지는 다섯 가지 형(사형·징역·금고·벌금·자격정지) 가운데 가장 가벼운 형이다. 그에 대해서조차 선고유예가 나왔으니 법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사실상 1백% 무죄"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대해서도 항소했다. 검찰이 1심 판결에 승복하고,특히 외환위기 본질 부분에 대해 항소하지 않았으면 우리도 항소하지 않았을 것이다.이미 너무나 많이 지쳐 있었으니까. 그러나 검찰은 항소했고 우리 사건은 현재 고등법원에 계류 중이다.

이제 나는 입을 열려 한다. 그간의 모든 진실에 대해.

1심 법정과 항소심의 최종 진술에서 나는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저는 지금도 외환위기에 대하여 '도덕적 책임', 또는 이미 사직을 함으로써 절차상으로는 이미 그 책임을 다 했다고도 할 수 있는 '행정적 책임'에서 자유롭고 싶은 마음은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입을 여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를 변명하거나 책임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나 외환위기는 제대로 기록되어 역사에 남아야 한다. 외환위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러기에 나는 우리 사회의 그 '망각'을 되살리려 한다. 외환위기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기에 나는 그 '왜곡'을 바로잡으려 한다.

하나님 권력 다음으로 국가 권력이 세다는 것을 나는 감옥에서 깨달았다. 지상의 법정에서 나는 이미 무죄를 받았지만,이제 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진실을 말하려 한다.

부득이 실명(實名)을 거론할 분들께는 미리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만일 나의 기록이 사실과 다르다고 생각할 때는 누구라도 공개적으로 내게 말해주기 바란다.

나의 모든 양심을 건 정확한 기록을 위해.

정리=김수길 기자

<필자 약력>

▶1942년 9월 24일 출생

▶경기고, 서울대 법대,미 시러큐스대 맥스웰 대학원(행정학 석사)

▶행시 4회(재경직)

▶경제기획원 물가정책국장·경제기획국장·차관보·대외경제조정실장

▶한국소비자보호원장

▶철도청장

▶공정거래위원장(장관급)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장관급)

▶시장경제연구원 운영위원장(현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