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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관령의 중공군 (105) 대관령의 승전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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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한시라도 출동을 늦췄다면 중공군은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대관령 고지를 선점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공국진 대령은 한신 대령을 계속 따라다니며 현장 전투 상황까지 점검했다고 했다. 두 사람의 치밀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는 1951년 5월의 제5차 2단계 공세 뒤 사라졌다. 동부전선에서 패퇴한 중공군은 그 뒤로 소모전 형식의 전투를 벌였다. 사진은 6·25전쟁에 참전한 미 해병대의 포병부대가 적 진지를 향해 야간 포격을 하는 모습이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공 대령의 기억으로는 그날(5월 21일) 오후 9시쯤에 1연대 선두를 맡은 수색중대가 먼저 대관령에 도착했다. 정상에 도달하자마자 총소리가 울렸다고 했다. 고지에는 우리가 먼저 올랐다고 공 대령은 기억했다. 수도사단 1연대의 출동시간은 3시간 늦춰졌고, 중공군 본대는 1연대가 도착한 뒤 1시간가량 지나 출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공 대령은 “1연대가 고지에 올라선 뒤 동쪽 방향을 향해 계속 총을 갈겨대면서 ‘신나는 전투’를 벌였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고지를 선점했고, 중공군은 인제 정면을 넘어선 뒤 쉬지 않고 내려온 참이었다. 그들은 보급도 달렸을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전투를 위해 장거리를 이동해오면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것이다.

1연대는 승리를 거듭했다. 적은 화력도 많이 소진한 상태였다. 아군이 사격을 가해도 제대로 반격을 하지 못했다. 전투를 잘했던 송요찬 장군의 수도사단이었다. 그들은 맹렬하게 치고 나가면서 적을 몰아붙였다.

당시 1군단은 대관령의 중공군과 함께 동부지역으로는 군단의 공병단까지 전선에 배치해 북한군을 맞고 있었다. 공병이 전투 일선에 나아가 적을 향해 총을 잡은 것은 그 이전까지는 전례가 없었다. 그럼에도, 허필은 대령이 지휘하는 공병단은 북한군을 맞아 침착하게 전투를 잘 치러냈다.

오대산에서 대관령 남쪽 일대까지 포진했던 수도사단은 험준한 산악을 헤치면서 적을 소탕했다. 1연대는 이 전투에서 1180명의 적을 사살했다. 전사자는 12명에 불과했다. 100대 1의 손실률이었다. 대관령을 넘어 강릉을 삼킨 뒤 보급 문제를 해결하고, 한편으로는 막대한 미군의 화약까지 노리면서 후방을 공략하려던 중공군은 이 전투에서 기세가 크게 꺾이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송요찬 사단장과의 불화로 수도사단 1연대의 출동이 조금이라도 늦춰졌다면 어떤 결과에 직면했을까를 생각한다. 대관령이 적에게 먼저 넘어갔다면 강릉까지 패퇴하면서 적에게 엄청난 기회를 만들어줬을지도 모른다.

공 대령은 내게 “소장으로 남을 겁니까, 희대의 명장으로 이름을 남길 겁니까”라면서 나를 자극했다. 그는 일부러 그랬을 것이다. 그는 회고록에서 나를 ‘대륙성 기질로 참을성이 강한 분이라서 좀체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적었다. 위급한 순간에 그런 나를 자극하기 위해 그런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두고 “드디어 군단장은 화가 났다. ‘로저스(미 수석군사고문)를 불러와, 함께 가자’라고 군단장이 말했다”라고 묘사했다. 그의 회고록이 맞다. 나는 로저스를 일부러 대동했다. 나는 송요찬 사단장이 계속해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적법한 절차를 거쳐 그를 그 자리에서 파면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내가 작전을 진두지휘할 생각이었다. 그 ‘적법한 절차’를 살리기 위해 미 수석고문관이 필요했던 것이다.

굼떠 보이는 내 ‘대륙적인’ 기질, 그리고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군단장인 내게 충고를 아끼지 않은 공국진 대령의 역할이 잘 조화를 이뤘던 것이다. 한신 대령의 기지도 인정해야 한다. 당시 남이나 북 모두 전선 사령관들의 나이는 30대 초반과 중반이었다. 젊은 혈기가 그대로 남아 있어 아군 사이에서도 불필요한 경쟁 심리에 젖을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그런 군단장과 사단장의 심리적인 알력을 감안해 병력을 모두 무장시킨 채 출동준비를 마치고 있었던 한신 연대장의 용의주도함은 높이 살 만하다. 어쨌든 그때 그 순간에 나는 공국진 대령과 한신 대령이라는 유능한 부하들과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점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대관령을 지키고 난 뒤의 전투는 우리 1군단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적은 맥없이 무너졌다. 일방적인 아군의 공세에 적은 그대로 쫓겨 갔다. 1군단은 23일까지 현재의 휴전선 일대까지 진격했다. 1950년 10월 말, 험준한 적유령 산맥을 넘어 한국 전선에 뛰어든 뒤 이상하고 괴이한 전법으로 늘 두려움을 심어줬던 중공군이었다. 그들은 대관령에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는 드디어 중공군의 실체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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