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지키려면 버려야 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투표를 한다는 것은 자기의 신념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와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 다수가 되었을 때 안도하고 기뻐한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나라가 움직이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 반대의 결과가 나왔을 때는 갈등과 긴장을 느낀다. 나라가 깊이 분열돼 있을 때 그 환호와 좌절은 어느 쪽이든 클 수밖에 없다. 이는 선거 결과에 직접 영향을 받는 정치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신념이 강한 사람일수록 그 좌절이나 기쁨이 중간지대 사람보다 더 크기 마련이다.

우리는 다수결로 결정되면 타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게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거 결과에 따라 나의 신념을 바꿔야 할까? 보수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이 진보가 승리했다 해서 생각을 진보로 바꾸어야 민주적인 사람이 되는가. 그렇지는 않다. 신념과 선거의 결과는 별개다. ‘정치적인 사람’이거나 ‘실용적인 사람’이라면 신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정치적인 사람’이라면 정권의 향배에 자신의 생각을 맞출 것이고, ‘실용적인 사람’이라면 개인의 이익을 좇아 자신의 생각을 조정해 갈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정치적이고, 실용적이라 한다면 이 사회에는 ‘정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 그때그때 누가 힘이 세고, 나의 이익이 극대화되느냐가 오직 판단 기준이 되는 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선거 결과를 무시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는 승자에게 일정 기간 나라 살림을 맡기도록 규칙을 정했다. 그 규칙을 따르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그 점에서 우리는 동남아시아나 라틴 아메리카의 나라들과 다르다. 그것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은 선거 결과에 비추어 자신의 신념을 돌아보는 기회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에는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 내 신념이 소중하다면 다른 사람의 신념 역시 소중하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먼저 내 것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이것이 타협이다. ‘내 생각은 모두 옳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은 숨 쉴 자리가 없어진다. 가치에도 우선순위가 있다. 내가 꼭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다른 가치들은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 어쩌면 포기하는 가치가 많아질수록 내가 진정으로 지키고 싶은 가치는 뚜렷하게 부각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신념을 지킬 수 있는 길이다.

이번 선거는 보수의 패배다. 한나라당 공천이 잘못되고, 누가 뒷짐을 지고 있었고, 천안함을 과도하게 이용했고 하는 등의 얘기는 모두 전술적인 얘기에 불과하다. 이번 패배를 이런 전술로만 돌릴 수 없다. 서울시의 선거 결과를 보라. 이 정부는 강남 정권에 불과했다. 뺑 둘러싸인 그 지도는 이 정권이 소수로 몰려가고 있다는 증거다. 그 이유는 이 정권이 모든 가치를 혼자 거머쥐려 했던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오만으로, 고집불통의 욕심꾸러기로 비친 것이 아니겠는가? 한나라당의 패배로 인해 이 나라 보수들은 좌절하고 있다. 그들이 보수정권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 나라 보수들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들이 그들의 패배와 함께 휩쓸려 가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대통령의 남은 임기 2년 반 동안 중앙정부가 여전히 모든 가치를 거머쥐려 하고, 지방정부는 새 가치를 내세우며 반기를 든다면 국정은 마비될 수밖에 없다. 한쪽이 양보해야만 할 경우가 종종 생길 것이다. 어느 쪽이든 양보할 수 있는 것이 많을수록, 지키고자 하는 가치는 지켜낼 수 있다. 보수가 지켜야 할 가장 큰 가치는 안보라고 생각한다. 보수가 일부 진보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점이 못 미덥기 때문이다. 우리 내부의 이슈는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안보는 한번 무너지면 끝장이다. 그 다음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는 교육이다. 공짜 점심을 주느냐 마느냐, 혁신학교냐 자율학교냐의 문제는 지엽적인 얘기다. 그보다 나라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의식교육은 막아야 한다. 4대 강이니, 세종시 문제 역시 지엽적인 것이다.

우리 국민은 선거를 통해 말해 왔다. 보수가 진정으로 지키고 싶은 가치가 있다면 부차적인 가치는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포기하는 것이 많은 쪽이 유연한 자임을 국민들은 안다. 남은 2년 반은 그 시험기간이다.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