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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신무기 ‘V1’ 발사 개시 … 전쟁 이길 것으로 착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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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나치 독일이 준비한 대망의 ‘경이로운 무기’ V1 비행폭탄. 1944년 6월 초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독일군은 그 보복으로 6월 12일 런던을 향해 10발의 V1을 발사했다. 독일은 1945년 3월까지 8000발이 넘는 V1을 런던으로 발사해 약 2400개가 명중했다. 그러나 경이로운 무기의 활약도 전쟁의 결과를 바꿀 수는 없었다.

히틀러, 신무기 ‘V1’ 발사 개시 … 전쟁 이길 것으로 착각

1944년 6월 6일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한 독일군의 대응은 혼란 그 자체였다. 독일 공군 기상관측관들은 6월 5일의 악천후를 이유로 침공 임박 가능성을 일축했다. 히틀러는 새벽 3시에 잠자리에 들었고, 노르망디가 아닌 파드칼레가 연합군의 공격 목표라고 믿은 참모들은, 어디까지나 ‘양동작전’에 불과할 노르망디 상륙 때문에 히틀러를 깨울 수는 없었다. 운이 안 따라 주려는지, 대서양 방어를 책임진 롬멜 원수는 휴가로 독일에 가 있다가 13만에 달하는 연합군의 상륙이 거의 끝난 오후 5시가 돼서야 전선에 돌아왔다.

6월 12일에 이르러 연합군이 확보한 5개 해변의 교두보는 단일 전선으로 굳어졌고 독일군은 조금씩 뒤로 밀렸다. 하지만 나치 지도자들은 ‘경이로운 무기’ V1에 큰 희망을 걸었다. 히틀러는 이것이 전쟁의 운명을 바꿔놓을 것이라고 믿었다. 50여 개의 발사대를 만들어 V1 비행폭탄을 런던으로 쏠 작정이었다. V1 비행폭탄은 제트기로 움직이는 초기 순항미사일이었는데 격추하기가 어려웠다. 히틀러는 이 신무기를 한꺼번에 수백 발씩 영국으로 퍼부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생산 과정에 문제가 생겨 제조가 늦어졌다. 히틀러는 서두르라고 채근했다.

결국 6월 12일 10발의 V1이 발사됐다. 그런데 4발은 이륙과 동시에 터졌고 런던까지 닿은 것은 겨우 5발이었다. 피해도 경미했다. 하지만 사흘 뒤 144발의 V1이 성공적으로 날아가 런던을 불바다로 만들자 분위기가 반전됐다. V1 발사를 놓고 국방군 보고서와 언론 보도는 마치 전쟁에서 다 이긴 것처럼 기세등등했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이었다. 선전장관 괴벨스는 여론의 추이를 보고 낙심했다. 위험한 낙관론보다는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싸우겠다는 결사항전의 자세를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곧 전쟁이 끝나기라도 할 것 같은 낙관적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선전장관은 개탄했다. 괴벨스는 이런 환상을 깨야 한다고 봤다.

히틀러는 V1 덕분에 새로운 기회가 열리는 것처럼 보이자 참모들을 거느리고 베르히스가덴의 별장을 떠나 서부전선으로 날아갔다. V1의 위력을 강조하며 흔들리는 독일군의 사기를 다잡을 참이었다. 하지만 롬멜은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연합군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가망 없는 일이며, 서부전선에서 더는 버틸 수 없으니 정치적 해결을 모색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날 오후 잘츠부르크로 돌아간 히틀러는 롬멜이 비관론자가 되었다면서 보좌진 앞에서 실망감을 드러냈다. “오직 낙관론자만이 일을 해낼 수 있다”고 히틀러는 강조했다. 현실을 외면한 낙관론은 언제나 패배를 부를 뿐이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