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理工系 기피현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이공계 기피현상이 해를 거듭할수록 심화하고 있다.올 대학입시에선 자연계 응시자 수가 인문계의 절반에도 못미쳤고, 서울대를 비롯한 상위권 대학의 이공계 합격자 등록률이 사상 최저를 기록했다. 대학 졸업자들조차 이공계 대학원 진학을 꺼려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때문에 대학·연구소는 연구인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고, 산업현장에선 기술인력을 구하지 못해 아우성이다. 이러다간 국가 경쟁력의 근간이 흔들릴 것이란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지난 6일엔 서울대 이공계 단과대 학장들이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나섰다. 서울대 이장무(李長茂)공대학장과 한국직업능력개발원 강무섭(姜武燮)원장이 본지 신성호(申性浩)논설위원의 사회로 이공계 기피현상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공계 기피 얼마나 심각한가.
이장무 학장=청소년들이 어려운 공부는 기피하고 예체능처럼 매력 있는 분야에 관심이 더 많다는 게 문제다. 1997년까지는 대입에서 이공계 지원자가 늘어왔으나 98년을 정점으로 줄어들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사태로 과학기술자들이 제일 먼저 회사·연구소를 떠나야 했던 게 바로 그 때다. 올해 수능에선 자연계 지원자 비율이 27%까지 떨어졌다.
강무섭 원장=고교생들이 수학·과학을 기피하고 있다. 교육과정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수학·과학 수준이 너무 어렵다고 지적한다. 학생들이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없다. 대학입시에서 교차지원을 허용한 것도 문제다. 대학 입장에선 신입생을 많이 뽑으려고, 고교에선 자기 학생들을 우선 합격시키고 보자는 이유로 교차지원을 악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학 정원정책 역시 잘못됐다. 대학들이 정원을 늘리면서 인문·사회계에 치중했다. 특히 사립대는 돈 적게 드는 인문·사회계 학생들을 많이 뽑으려 한다. 사회 인력 수요와 역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3급 이상 고위 공무원직에 이공계 출신이 6~9%에 불과할 정도로 대우를 못받고 있다.
▶이제 해외 기술인력에 의존해야 하나.
李=우리는 수출도 많이 해야 하고 선진국과 경쟁도 해야 한다. 우리의 경쟁력은 양질의 과학기술 인력에 있다. 한국의 노임 수준은 이미 영국을 넘어섰다. 노동력으론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는 얘기다.과거엔 우수 인력이 이공계를 많이 지원해 경쟁력의 밑거름이 됐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됐다.
姜=인적자원을 개발해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한다. 그러나 산업체에서 정작 필요한 사람들은 구하기가 어렵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남아돈다. 이공계 기피 현상은 이런 인력 수급 불균형을 악화시킬 것이다. 앞으로 5~10년이 지나면 대졸 연구인력도 외국 기술자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으로 우려된다. 지금도 일부 지방 대학·연구소에선 해외에서 사람을 들여와 연구인력으로 쓰고 있다.
▶대학입시를 학교 자율에 맡길 수 없나.
李=현재의 고교 교육은 문·이과를 명확히 나누는 제도다.7차 교육과정에선 구분이 없어진다고 하나 당장이 문제다.상대적으로 쉬운 문과 공부를 해 대학에 들어가는 데 악용하지 않도록 교차지원 제도를 제한적으로 운용해야 한다. 또 현행 입시는 우수 학생들의 이공계 진학을 어렵게 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일반고와 똑같은 과학고생들의 내신 등급 반영 문제다. 모집단위 광역화제도 역시 수험생의 선택 폭을 넓혀주자는 의도지만 입학 후 자신이 원하는 전공을 고를 수 있을지 불투명해 학생들이 기피한다. 입시는 대학 나름대로 우수 학생을 뽑을 수 있도록 자율에 맡겨야 한다.
姜=핵심 과학기술 인력 양성 차원에서 수학·과학 재능 보유자가 이공계에 진학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 현행 대입 제도는 너무 획일적이다. 학생 선발권을 대학에 되돌려줘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
▶과학기술 교과 과정을 혁신하려면.
李=중·고교 과학 교과서가 어렵고 딱딱하다. 최근 6개 고교를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물리를 선택한 학생이 6%에 불과했다고 한다. 물리는 공학의 기본인데 어렵다며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교과 과정을 쉽게 하고 실험실습 위주로 바꿔야 한다. 대학 교육도 반성할 게 많다. 기술과 세상이 급변하는데 학과 분류체계는 그대로다. 자기 분야만 고집할 게 아니라 이공계와 다른 전공을 통합하는 등 학문간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산업체로부터 환영받는 인력을 배출하는 것도 대학이 할 일이다.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등 산업체 경력자를 교수로 채용해 실용 중심의 교육을 해야 한다.
姜=국제 수학·과학 올림피아드 등에서 우리 학생들이 상위권에 들어가지만 심화과정에선 수준이 떨어진다. 암기 위주 교육이어서 그렇다. 실험실습 위주의 교육이 이뤄지도록 대폭적인 시설 투자를 해야 한다. 고 2,3학년이 수학·과학 교과를 많이 선택하도록 진로지도도 강화해야 한다. 특히 여학생이 이공계 진출을 많이 하도록 유도하는 게 필요하다. 대학이 산업현장 기술자를 양성하는 이공계 특성화를 추진하도록 정부가 재정 지원에 나서야 한다.
▶이공계 유인책은 뭔가.
李=우리나라만 쓸 수 있는 처방이 있다. 바로 병역특례제도다. 그동안 이공계 우수 인력을 산업체에 진출케 해 국가 기술경쟁력 강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지금은 병역특례 정원이 벤처업체에 집중돼 있다. 우수 인력을 유인하려면 대형 제조업 분야를 중심으로 정원을 대폭 늘려줘야 한다.우수 과학기술 인력에 대한 홍보도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박찬호·박세리 선수와 같은 월드 스타들을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키워야 한다.
姜=몇몇 대기업의 경우 임원급 절반 이상이 이공계 출신이다.해외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과학자도 적지 않다.학생들이 과학기술 분야에 관심과 흥미를 갖도록 국가·사회 차원에서 이런 사람들의 활동상 등을 적극 알릴 필요가 있다.청소년 대상 수학·과학 경시대회를 많이 열어 수상자에 대한 장학금 지급 등 혜택을 제도화해야 한다. 저명인사를 초청해 성공담을 들려주는 등 중·고생들에게 이공계에 대한 안목을 키워주는 교육도 필요하다.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있는 인재를 발굴해 평생 지원하는 정책 도입도 검토해 볼 만하다.
▶과학기술 인력에 파격적 대우 필요한가.
李=과학기술 유공자에게 국가가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면 자연적으로 이공계 지원이 많아질 것이다. 기능올림픽 입상자들을 우대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게 필요하다. 원로 과학자 가운데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을 특별 대우하는 것도 중요하다.정부 고위직 공무원 채용에도 일정 비율을 이공계로 뽑는 채용 할당제를 도입해야 한다. 기술고시에 합격해 공직에 들어갔던 제자가 위로 올라갈수록 한계가 있어 다시 사법시험에 도전했다고 하더라.
姜=청와대에도 과학기술 정책을 전담하는 별도의 수석비서관이 없다. 과학기술부·산업자원부 등 과학기술 관련 부처의 장·차관을 비롯한 요직엔 상징적 의미에서도 이공계 출신들을 임명해야 한다. 특히 여자 대학들이 이공계 학과 신설 등을 희망하면 정부가 전폭 지원해야 한다. 과학기술은 소프트한 분야가 많기 때문이다. 기업들도 장학금·연구비 지원을 통해 이공계 육성에 적극 나서야 한다.
사회=신성호 논설위원
정리=김남중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