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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나라 위해 우리 변절합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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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K위원장께.

같은 학교에 다녔다는 인연을 빌미로 이런 글을 쓰자니 다소 민망한 것이 사실이오. 우리가 입학한 1964년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를 밑돌았고 모두가 배가 고팠소. 그때 전쟁의 잿더미를 전후 성장의 신화로 바꾼 라인강의 기적을 본떠 군사정부가 내건 '한강의 기적'기치는 젊은 우리를 질타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지요. 그래서 그런지 우리 학번에는 관리로 나간 사람이 유난히 많았으며 장관이나 장관급만도 기호, 봉균이, 석채, 이헌이 그리고 학계에서 참여한 당신 등 여럿이었소.

*** 젊은 우리 매혹한 '한강의 기적'

지금 국회가 아주 시끄럽소. 그중에는 공정거래법 개정안 시비도 한몫 거드는데 출자총액 제한제도 유지, 계좌 추적권 부활, 금융 계열사 의결권 축소가 그 골자입디다. 여권의 전방위 지원에도 불구하고 재계는 나라 경제의 운명이 달렸다고 읍소하는 판이니 해당 부처의 수장으로 여간 괴롭지 않을 것이오. 학창에서나 사회에서나 K형은 중용을 걸어왔소. 시민단체에 관여한 것도 정도에서 벗어난 재벌의 탈선을 시정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였다고 나는 믿소이다. 그제나 이제나 껄렁껄렁한 나는 당신보다 다소 '래디컬한'쪽에 있다고 믿었는데, 이것이 뒤바뀌고 말았소. 내 편이냐 아니냐를 유난히 따지는 이 정권 아래서 K위원장은 개혁의 선봉이고, 나는 수구 논객으로 몰리니 말이오.

삼성전자와 포스코의 외국인 지분이 각각 54%와 70%이고, 국민은행과 외환은행 역시 77%와 72%에 이르고 있소. 미국인 조지와 영국인 토니가 이 기업의 회장과 사장이 되고, 독일인 한스가 이 은행의 행장으로 오는 것이 아닌 밤중의 잠꼬대가 아니오. 삼성전자 본사를 미국으로 옮기라는 외국인 주주들의 요구가 장난이 아니듯이, 1768억원을 투자한 소버린이 자산 47조원의 SK그룹을 집어삼키려는 공작도 결코 장난이 아닌 현실이오. 며칠 전 미국에 사는 친구로부터 한국 기업인에게 E2 비자 발급을 재고해야 한다는 논의가 미국 관청에서 나왔다는 얘기를 전화로 들었소. 이 비자는 한국 기업의 직원이 미국의 한국지사나 공장을 방문할 때 발급하는데, 삼성전자나 포스코는 한국 기업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주장이 나왔다는 것이오. 경제에 혈액을 공급하는 은행들이 넘어가고, 황금 알을 낳는 기업들을 내주면 우리는 대체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오?

지난 국정감사에서 이런 답변을 했다지요? 적대적 인수 합병에 대비해 삼성전자의 지배주주 주식에 '차등 의결권'부여를 검토할 수 있다고요. 외국인 주주나 국내의 소액주주.시민단체들이 가만있을 리 없고, 재경부조차 난색을 표하는 마당에 실현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나는 K위원장이 현안의 심각성을 바로 보고 있다고 생각했소. 그러니 되지도 않을 일을 벌이기보다 공정위 결심에 따라서 되고도 남을 일을 찾아봅시다. 출자 제한을 풀어주고, 금융 계열사 의결권을 인정하는 '쉬운'길이 있지 않소? 물론 재벌의 금융 계열사 의결권은 인정하라면서 경영권 방어를 위해 정부가 투입하려는 연기금에 대해서는 의결권을 제한하라는 재계의 욕심에는 혀를 찰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외자는 펄펄 나는데 우리 기업은 제힘만큼 걷는 것도 막는 '역차별'은 나라 경제의 대계를 위해 옳은 궁리가 아니지요.

*** 우리 기업 '역차별' 옳지 않아

K위원장의 관심은 재벌의 탈선에 있는 듯하오. 소관 부서의 임무가 그렇다는 변명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이, 공정위는 한국 경제를 위한 공정위지 공정위를 위한 공정위가 아니기 때문이오. 반면 나의 초조는 외자에 의한 국내 기업 초토화에 있소이다. 그러니까 한국 경제의 초미의 현안이-이를 테면 주적이-바뀌었다는 생각이고, 80년대의 풋내 나는 도식을 빌리면 반자본의 피디(PD)에서 반외세의 엔엘(NL)로 '변절한' 것이지요. 재벌의 버릇은 고쳐야 하지만 한층 더 절박한 숙제가 우리 기업을 지키는 일이란 말이지요. 그런데도 K형은 여전히 재벌을 탓하고 나는 외자를 걱정하다면, 당신이 보수가 되고 내가 개혁이 되는 셈이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혜를 빌려 우리 조금씩 생각을 바꿔보기로 합시다. 나의 변절이야 주석의 안주감이지만, 나라 경제를 위한 K위원장의 변절은(?) 얼마나 근사한(!) 일이겠소.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