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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외척 (外戚)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베갯머리 송사는 아무도 못당한다."

최고 권력 근처를 경험한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베갯머리에서 아내가 남편의 귀에다 속삭이는 각종 주장이나 소청이 얼마나 막중한 영향력을 지니는가를 설명하는 말이다. 아내의 목소리는 곧 외척(外戚)의 목소리일 것이다.

요즘 인기 있는 역사 드라마들은 모두 조선왕조 외척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조선의 3대 세도가 사람들이다.'여인천하'의 주인공 문정왕후의 친정인 파평 尹씨,'명성왕후'의 집안인 여흥 閔씨,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원군에게 숱한 수모를 줬던 안동 金씨 집안(순조 임금의 비인 순원왕후의 친정)이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외척을 찾자면 아무래도 1126년 고려 인종시절 난(亂)까지 일으켰던 이자겸(李資謙)이 단연 두드러진다. 경원(慶源)李씨, 혹은 인주(仁州)李씨라고도 불리는 집안인데, 원래는 통일신라 말 인천지방의 호족이었다. 이자겸이 다른 어떤 시대보다 막강한 외척세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고려왕실의 근친혼(近親婚)관습 덕분이었다.

이자겸의 둘째 딸은 예종의 부인, 다시 말해 인종의 생모다. 인종의 외할아버지 이자겸은 사위 예종이 일찍 숨지자 자신이 키우던 어린 외손자(당시 14세)를 왕좌에 앉혔다. 그 다음 셋째, 넷째 딸을 한꺼번에 인종에게 시집보냈다. 인종은 이모 두 사람을 아내로 맞았고, 이자겸은 임금의 외할아버지 겸 장인이 됐다.

그러니 이자겸의 등등한 위세는 조선 세도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자신의 생일을 임금처럼 '인수절(仁壽節)'로 삼고 관료들의 하례를 받았고, 백성이 굶어죽어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빈 집'인데 이자겸의 창고에선 고기가 수만근씩 썩어나갔다. 장성한 임금이 측근을 시켜 잡아들이려 하자 거꾸로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가 불을 지른 뒤 임금을 자신의 집에 연금시킨다.'이자겸의 난(亂)'이다.

예나 지금이나 최정상의 권력은 외롭기 마련이라고 한다. 청와대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청와대의 밤은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말한다. 썰렁한 기와집에서 노부부의 겨울밤은 길 것이다. 대통령의 처조카 이름은 청와대 베갯머리에서도 오르내리지 않을까.

오병상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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