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좋은 하루 되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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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좋은 하루 되세요." "네? 아-그러세요."

얼떨결에 전화를 끊지만, 식용유 한 병을 통째로 삼킨 듯 느끼한 불쾌감이 가라앉지 않는다. 자주 들으니 이력이 나서 요즘엔 상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찰칵,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맨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온몸에 두드러기가 날 만큼 거슬렸다. 눈부신 햇살은 없었지만 꽤 괜찮게 시작된 나의 '좋은 아침'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

*** 번역투 인사말의 거북함

이 자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이러지? 누가 자기보고 내 하루를 걱정해 달랬나? 서로 얼굴도 안 보고 목소리만으로 겨우 몇분 소통했을 뿐인데 벌써 내 인생에 개입하려는 그가, 그녀가 괘씸했다.

내 반응이 너무 과격한가? 내가 느낀 거북함은 모국어에 대한 나의 감각과 관계가 있다. '좋은'과 '하루'의 조합이 도무지 어색했다.

멀쩡한 우리말의 허리를 자르고 외래어를 끼워 넣은 듯 자연스럽지 않았다. 차라리 즐거운 아침이라 하지 '좋은 아침'이 뭔가? 영어의 '굿 모닝'을 그대로 옮겨놓은 꼴 아닌가.

나는 일부러 사전을 찾아가며 아름다운 우리말을 쓰려고 노력하는 작가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말을 왜곡하거나 서투른 외래어로 더럽히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정확한 문장이 내가 추구하는 목표였다.

글이든 말이든 삶이든 진실하다면, 꾸미지 않더라도 당신이 알아주리라 기대한 내가 잘못이었나? 가끔 일 관계로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오만하다는 말을 듣는다. 인사를 잘 하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사교의 기술에 대한 나의 거부감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다. 지나치게 성실한 당신은 일체의 허식과 군더더기를 혐오했는데, 고지식함이 도를 넘어 피곤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반성해본다. 적당한 인사말은 팍팍한 현대생활의 윤활유가 아닌가. 어울리는 곳에 걸려 있다면 그림도 장식이 아니라 벽의, 공간의 일부가 되듯이.

그래도 좋은 하루는 틀렸다. 그냥 옛날대로 "안녕히 계세요" "잘 있어" "밥 먹었니□" 하면 어디 덧나나? 꼭 그렇게 버터 바른 빵을 먹은 티를 내야 하나. 서양문화에 대한 뿌리 깊은 열등감이 지겨워 진저리를 쳤던 건데,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다룬 텔레비전 뉴스를 보며 새삼 우리를 되돌아본다.

잊었던 6.25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아, 아버지. 당신의 청춘을 저당 잡혔던 동족상잔의 끔찍한 전쟁이 불과 50년 전의 일인데, 우리는 지금 우아하게 아침타령을 하는군요.

'밥 먹었니?'의 수준을 넘어 우리 사회가 안정돼 간다는 징조일 텐데, 진짜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아쉽다. 지하철에서 떡 하니 다리 벌리고 앉아 두사람 자리를 혼자서 독점하지 말고, 승객이 타기 전에는 버스가 떠나지 않고, 땀 흘린 사람이 허무해지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우리 어법에 맞지 않는 인사말로 무늬만 세계화한다고 일등국민이 되는 건 아니다. 꼴등이라도 속을 채우면 언젠가 찬란한 열매를 맺으리라. 겉은 허술하더라도 속이 꽉 찬 개인이나 나라에서 진정한 국제경쟁력이 나오는 게 아닌가.

*** 문화는 흉내 아닌 성숙

다행히 새해가 시작돼 내가 두려워하는 '좋은 하루' 대신에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나누는 일이 잦아졌다. 한 10년 뻣뻣하게 살았으나,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많아 요즘엔 나도 남들을 따라가느라 목이 아프다. 이왕 적응할 바엔 창조적으로 해야지.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남으면 저한테도 조금 나눠주세요." 후다닥 준비한 말을 총알처럼 던지면 사람들이 웃는다.

▶필자 약력=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시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작과비평사). 산문집 『시대의 우울:최영미의 유럽일기』(창작과비평사).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창작과비평사). 산문집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사회평론)

崔泳美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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