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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실용] 아듀, 의미없는 시간들이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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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에 길을 나선 여자
조안 앤더슨 지음, 박은희 옮김, 따님, 223쪽, 8500원

그대 지금 누구랑 노느라, 자신을 방치하는가?

혼자서는 24시간이 마냥 버겁던 시절이 있었다. 나의 뿌리까지 뒤흔드는 폭풍 같은 격정과 소름돋히는 흥분과 한없는 너그러움을 두루 갖춘, 정말 가당찮은 애인이 옆에 상주하길 기대했던 시절, 서로에게 서로가 목메는 친구들이 절실히 필요했던 시절 역시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작업이 단순한 생계의 목적 만이라는 사실이 못내 구차스레 느껴졌던 한 때와 지금 이 순간이 있다. 나는 누구이며 내 옆에 있는 이는 누구이며 우리는 왜 철저히 각자들이며 또한 어디로 가는가, 그것만이 밤으로 낮으로 떠오르는 바로 이 시기.

그런 시기적 배경이 맞아떨어져서 일까, 이 책의 저자 조안과 나는 참으로 괜찮은 시기에 괜찮게 만났다.

그간 나는 페미니즘을 부르짖으며 성공한 여자들의 자전적 에세이는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 편견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어쨌든 이 책을 펼쳐들 때 약간의 거부의식이 있었다. 성공한 여자들 뻔하지뭐, 신세한탄에 남성피해의식에 자기우상 만들기. 그런데 웬걸 이 여잔 뭔가 다르다.

조안은 오십에 뜬금없이 남편과 별거를 선언하고, 유년이 있는 시골의 오두막으로 길을 떠난다. 나를 만나겠다, 내 삶을 살겠다는 목적도 없다. 떠나고 싶은데 떠날 곳이 그곳밖에 없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떠난 길에서 그녀는 삶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는다. 계기는 미천하다. 생계를 위해 생선가게에서 일을 하면서, 무료한 시간을 떼우기위해 인근 바닷가에서 물개와 수영을 하면서, 그리고 고장난 온수기의 수리비를 벌기 위해 조개잡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칼럼리스트였던 그녀가 때마침 일자리까지 잃고, 오롯이 먹고살기를 목적으로 생선가게를 찾는 대목이 있다.

‘돈이 필요해요, 일을 줘요….(그러다 자격지심이 일어나, 자신을 포장하고 싶어져: 내 생각) 나는 작가예요, 경험이 필요해서…’. 나는 왜 이 별 거 아닌 대목에서 왈칵 그녀에게 쏠렸을까. 어느 날 작가로 밥먹는 내가 일거리가 잘려 새로운 일을 해야만 할 때 나는 과연 그녀처럼 생선대가리를 쳐야 밥을 먹는 생선가게를 기웃거릴 수 있을까? 자신 없었다. 이후 나는 그녀의 글을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세끼의 도시락을 챙겨 뻘로 조개잡이를 하러갈 때도 감상을 섞지 않는다. 1200달러의 수리비를 벌려면, 몇 바구니의 조개를 캘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다. 경이로웠다. 살면서 내가 하는 일에 무수한 포장된 이유들을 만드는 나에게 ‘우매한 시청자들에게 인생이 이런 것이다 가르쳐야 하지 않는가? 아, 사람들은 정말 뭘 모르고 사네, 답답하네 그러니 내가 나서서….’ 그녀는 그것이 얼마나 자만한 일임을 일깨워준다. 밥을 먹여주는 일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 경의를 그냥 몸으로 느끼게 한다.

아는 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무작정 자식이 오기를 기다리며, 이미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잘살고, 나는 나대로 잘살고 있구나를 깨닫는 그녀를 보며, 단순히 돈 벌고 힘들면 샤워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삶만이 그리고 긴 외로움 속에서 자신과 대화하는 일만이 ‘의미로움’을 깨닫는다. 일년간의 단순한 노동과 무작정 혼자 있기를 통해, 그녀는 참으로 많은 것을 느끼고 오래도록 운다. 신파여도 그 눈물에 나는 같이 마음을 내어준다. 그리고 그녀처럼 늙어, 늙음이 주는 지혜를 경이롭게 기다리기로 한다. 늙은 여자에게 경배를!

노희경(드라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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