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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다가서자 장끼·까투리 푸드득,쓰레기 매립장이 야생 사파리 변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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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호 22면

지난 1일 오후 5시. 탐사를 나선 지 7시간 만이었다. 노을공원 사면에서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 꿩이다!” 장끼와 까투리 한 쌍이 인기척을 느끼고 놀라 날아오르는 중이었다. 동물원 우리에 갇힌 꿩에 익숙한 기자에게 야생의 꿩은 낯설었다. 관목들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난 붉고 푸른 장끼가 유난히 돋보였다. 일단 꿩을 한 번 보고 나니, 난지공원 사면 이곳저곳에 숨어 있던 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날갯짓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면 장끼나 까투리가 곳곳에서 날아올랐다. 다른 동물도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월드컵공원으로 가기 전 오전 10시쯤 먼저 종묘에 갔었다. 도심의 한복판임에도 거기엔 너구리가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다. 종묘는 조선 왕조 500년간 신림(神林)으로 보호해 숲이 울창한 채로 보존돼 있다. 일본인 관광객 10여 명을 제외하면 토요일 오전의 종묘는 한산했다. “어,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수풀이 우거진 곳을 지날 때마다 몇 번이나 숨을 죽였다. 조심스럽게 다가가보면 낙엽을 뒤지는 까치들이었다. 종묘를 헤집고 다니길 세 시간여, 정전 뒤 숲에서 다람쥐와 비슷하게 생긴 청설모 한 마리를 발견했다. 어른 팔뚝만 한 잿빛 청설모 한 마리가 높다란 나무를 타고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고 있었다.

종묘에서 오전 나절을 보내는 동안 청설모와 까치·멧비둘기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가끔 나타난다는 너구리를 볼 확률은 어느 정도일까. 종묘 관리소장 이상현씨는 “멧비둘기나 청설모는 많지만, 너구리는 쉽게 보기 힘들다”며 “너구리들도 언제 사람들이 없는지 다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개장 시간이 지난 밤에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월드컵공원에도 너구리가 산다. 1993년 난지도의 쓰레기 매립을 중단한 이후 지속적으로 복원된 생태계에는 지금 900여 종의 동식물이 존재한다. 월드컵공원 내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에는 너구리와 족제비·고라니가 나타난다. 월드컵공원 관리사무소 김종찬씨는 “지난 4월에도 CCTV에 고라니가 포착됐다”고 했다. 월드컵공원에는 이런 CCTV가 총 7대 설치돼 있다. 이들 야생동물은 따로 먹이를 주지 않아도 공원 안에서 자급자족하며 산다. 공원 곳곳에 낮은 관목들이 드리워져 있어 작은 포유류나 조류가 몸을 숨기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동물들이 길을 건널 수 있도록 통나무 이동로도 설치돼 있다.

노을공원 사면 곳곳에는 ‘야생동물 출현지역’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족제비나 너구리·고라니가 나타난다는 알림말이다. 위치마다 자주 출몰하는 동물의 종류도 달랐다. 고라니는 2㎞ 밖에서도 사람 냄새를 맡는다. 겁이 많은 데다 야행성이기까지 해 관리사무소 직원들도 직접 본 적은 거의 없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조류는 관찰이 쉬운 편이다. 2008년 기준으로 월드컵공원에는 총 55종의 조류가 산다. 말똥가리나 꾀꼬리·박새 등 보호종으로 지정된 새들도 많다.

월드컵공원은 조류가 살기에 비교적 좋은 환경을 갖췄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이우신 서울대(산림과학부) 교수는 “새들이 잘 살기 위해서는 먹이·둥지·물 등이 필수적이다. 특히 새들은 날기 위해 깃털을 깨끗이 해야 하기 때문에 물가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기자가 꿩을 여섯 마리나 발견한 난지공원 주변에도 홍제천이 흐르고 있다. 습지도 조성돼 있어 야생동물들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환경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접근성이 좋아 부작용이 생기기도 한다. 이우신 교수는 “월드컵공원의 너구리는 사람들이 주는 먹이 때문에 비만에 시달린다”고 전했다. 오후 7시. 노을공원 앞으로 해가 넘어갔다. 종묘에서 시작해 월드컵공원으로 이어진 하루 동안의 탐사도 끝났다. 도심에서 마주한 야생의 흔적은 짧지만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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