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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 하루 만에 평가 뒤집은 해외투자가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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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지난 수십 년간 유사한 상황이 수십 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주한미군사령관들의 대한민국 방위에 대한 강력한 결의 표명이 북의 군사적 도발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선제적 조치였다.

35년 전 베트남전이 끝나자 한반도에서도 남침설이 제기됐다. 1975년 6월 17일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모골이 송연한 경고가 거듭됐다. 그때도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제임스 할링스워드 장군이 단호한 격퇴 발언으로 한국민의 결의에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남침하면 휴전선서 분쇄’ ‘주한미군 9일 속전 전략 세워’ ‘B-52 중폭기 24시간 출격 - 하루 천 회 맹폭’ ‘적의 심장부를 때리겠다’…. 할링스워드 장군의 통역을 담당했던 나는 당시의 신문·사진 등을 아직도 소장하고 있다.

한국민은 6·25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북으로부터의 갖가지 군사적 도발을 경험했다. 이제 북의 전략과 국지 전술을 알 만큼 안다. 어떤 도발에도 흔들리지 않고 되받아칠 결의가 있다. 그러나 외국인은 다르다. 이번 주에 세계적 투자기관의 중역 여러 명이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십여 년간 한국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하필 그들이 서울에 도착한 날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이 크게 올랐다. 그들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본사에 전화해 한국에 대한 투자한도를 당장 크게 줄이는 제의를 준비하라고 했다. 위험이 높은데도 조치하지 않으면 주주들로부터 소송을 당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제 아침 그들은 한국을 떠나기 직전 오히려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한국은 서바이브(살아남느냐)가 아니라 스라이브(융성한다)하게 돼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4강과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지정학적 위협을 오히려 비즈니스의 허브로 활용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고 평가했다.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냉철한 판단으로 수천억 달러 이상을 운용하는 세계적 전문투자가들이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떠났을까?

주가가 폭락하던 날 그들은 한은총재, 금융위원회 부위원장과 외신대변인, 대통령국제경제보좌관 등을 연이어 만났다. 그날 저녁에는 서울파이낸셜포럼 회장과도 오랜 시간 만났다. 이런 대화를 통해 그들은 그간 외국 투자가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첫째, 북한은 독자적으로 지속적인 전면전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전쟁수행에 필요한 연료조차도 부족하다. 둘째, 초반에 많은 인명피해를 낼 수 있지만, 한미연합군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해 며칠 못 가 북이 괴멸한다. 셋째, 한국군 이외에도 수만 명의 미군이 방어하고 있다. 한반도 인근 해역은 미7함대가, 한반도의 하늘은 오산 미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할 것이다. 넷째, 한반도 전쟁이 야기하는 난민처리 문제, 중국 경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 미국과 국경선을 맞대야 하는 등 갖가지 잠재적 문제 때문에도 북의 군사적 도발을 중국이 원하지 않을 것이다. 다섯째, 중국이 G2답게 리더십을 발휘해 북의 사과를 끌어내고 6자회담을 재개해 북한 경제개발을 위한 국제적 협력을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할 개연성이 크다.

이들은 무엇보다 자기들이 면담했던 한국인들의 우수성과 직무에 대한 충성심, 근면성에 경탄한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의 튼튼한 펀더멘털과 성장잠재력에 감명받아 한국에 대한 투자를 오히려 늘리겠다고 결론 내렸다.

이런 평가가 틀리지 않는다. 한국인은 국가적 위기 때마다 뭉쳤다. 자발적인 금 모으기 운동, 태안반도에서의 자발적 봉사, 임진왜란 때의 의병·승병 봉기가 그 사례다. 한국 기업의 연구개발(R&D) 투자는 GDP 대비 세계 1위이고, 자동차·조선·중공업·IT산업 등 한국 기업이 전 세계 제조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리더다. 금융·의료·교육·관광산업, 엔터테인먼트(한류) 등 신성장동력을 잘 살리면 한국은 다시 고도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G8 의제를 담당했던 런던 재무부의 한 관리는 “한국인의 능력이 자기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서울의 G20정상회의가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반도에서 군사적 도발만 없다면 남북이 경제협력으로 상생하고, 함께 융성하는 국운을 맞이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수룡 도이치은행그룹 한국회장 겸 한국대표  미공군협회 미그앨리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