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문화재도 '명퇴' 시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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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인간문화재에 '명퇴'제도를 도입한다.

우리나라 인간문화재는 지난해 말 현재 모두 2백6명이다. 이들 중 90세를 넘긴 사람이 6명, 80세를 넘긴 경우는 수십 명이나 된다. 일부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일어서지 못하며, 또 일부는 시력이 약해지고 힘이 달려 제대로 된 민속공예품을 만들지 못하기도 한다.

문화재청(http://www.ocp.go.kr)은 이달 말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이처럼 제기능을 못하는 인간문화재를 심의해 다음달 중 명예퇴직시키기로 했다.

명퇴 방식은 '명예보유자'제도의 도입이다. 명예보유자는 인간문화재로서의 명예와 최소한의 정부 지원은 계속 받을 수 있으나 후학들에게 전통문화를 가르치고 이수증을 발급해 주는 권한은 잃게 된다. 명예는 지니지만 실질적인 전통문화 계승의 권한은 박탈당하는 셈이다.

'인간문화재'란 '중요무형문화재 기능.예능 보유자'를 일컫는 속칭이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1백8개 종목의 전통문화를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란 뜻이다.

인간문화재로 지정되면 정부의 지원(전승지원금)을 받을 권리와 동시에 전통문화를 재현해 보여주고 후학들에게 가르쳐 전승시킬 의무(전수교육의무)도 생긴다.

문제는 의무를 다 못하는 인간문화재를 퇴출시키기가 현실적으로 쉽지않다는 점이다. 1964년 인간문화재 제도가 도입될 당시 마구잡이식 지정에 문제가 많아 일부 퇴출시킨 사례는 있으나 이후 인간문화재 퇴출제도는 사실상 사문화돼 왔다.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기능.예능보유자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고, 이들을 강압적으로 퇴출시킬 만한 평가.심사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초고령, 또는 기능 상실 인간문화재들은 원활한 전통문화 계승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부작용을 낳아왔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은 이들을 명퇴시키는 '명예보유자'제도를 마련, 지난해 관련 법규를 만들고 예산까지 확보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인간문화재들의 명예를 존중하는 한편 이들이 후배에게 길을 터주는 방안으로 마련된 것이 '명예보유자'제도다. 제기능을 못하는 인간문화재 문제가 심각하고, 그렇다고 전통문화 발전에 공헌해온 사람들을 무작정 몰아내기도 힘든 상황에서 나온 고육지책(苦肉之策)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기존의 인간문화재가 명퇴하게 되면 그 분야의 유망한 후계자를 새 인간문화재로 임명할 수 있다. 따라서 잘 활용하면 인간문화재 제도의 효율화와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문화재청은 전국 인간문화재에 대한 전면적인 실태조사를 벌일 계획으로 알려졌다. 인간문화재가 자신이 보유한 무형문화재를 정확하게 전승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최초의 본격적인 조사활동인 셈이다.

최근 전통 공예품에 국적불명의 장식을 더하는 경우나 전통 춤사위를 마음대로 변형시키는 등 고유의 무형문화재를 훼손하는 인간문화재가 적지않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문화재청은 문화재 전문가들과 함께 모든 인간문화재의 활동상을 점검한 뒤 지정 당시와 달리 변형된 부분이 있을 경우 시정을 지시할 방침이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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