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허남진 칼럼

설마가 사람 잡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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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한 희생자 유가족의 눈물 섞인 원망이 벼락처럼 후려친다. 천안함을 침몰시킨 주범은 북한이지만, 그걸 부른 건 그놈의 ‘설마’였다. 도발 위험이 가장 높다고 지목돼온 서해의 최전선에서부터 군의 최고 지휘탑까지, 북한이 설마 도발까지야 하겠느냐는 이상한 믿음이 퍼져 있었던 것이다. 군뿐만이 아니다. 정부도, 어쩌면 일반 국민까지도 ‘설마’란 몹쓸 병에 걸려 있다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야당은 천안함 책임을 물어 현 정부를 매섭게 추궁하고 있다. 북한 소행임을 인정하지 않던 초반의 태도를 바꿔 현 정부의 안보무능을 강하게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비열한 테러행위임이 명백하게 드러났고, 테러의 속성상 이를 예방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를 막지 못한 결과적 책임은 면할 수 없다. 더 나아가 북한군의 동태 파악에 어두웠고, 보고체계가 엉망이었으며, 초기 대응에 허둥대는 등 안보의 허점을 드러낸 책임은 결코 작지 않다. 야당의 이런 지적들은 틀리지 않다.

다만 ‘햇볕정책’을 펼치던 그들의 입에서 안보의 중요성을 듣게 되니 낯설어 보일 뿐이다. 오히려 그들이 ‘햇볕정책’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우리 사회의 총체적 안보불감증을 부른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햇볕정책 자체를 탓하는 게 아니다. 햇볕정책은 평화적 방법에 의한 통일의 가능성을 실험해봤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남북 접촉이 활발해지면서 북한 주민 저변에 끼친 영향도 상당하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햇볕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안보태세를 방치한 측면이 없지 않다. 북한으로 향해야 할 ‘햇볕’이 남쪽에만 쪼였는지 옷을 벗어야 할 북쪽은 핵무장의 털갑옷까지 껴입었고 남쪽만 발가벗은 셈이 됐다. 무엇보다 대북 정보체계를 붕괴시킨 책임이 크다. 전직 국가정보원 출신들은 “중국 등에서 활동하던 비공개 정보요원들이 노출되는 등 대북 정보 수집 체계가 사실상 와해됐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대북 정보의 총책임자인 국정원장이 대북 교섭창구의 최일선에 나선 것부터가 잘못이다. 노무현 정부 관계자들은 현 정부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해체한 건 문제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당시 그 기구가 안보 강화 쪽으로 기능했는지, 아니면 북한과의 대화에만 매달렸는지 자문해보길 바란다.

이명박 정부의 안보관도 그 연장선상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천안함 사태가 바로 그걸 말해줬다. 북한 어뢰를 막아내지 못한 1차 책임은 분명 현 정부의 안보 무감각이 짊어져야 한다. 그와 동시에 지난 정부 또한 우리 사회를 안보 무감각의 ‘설마병’에 걸리게 한 원인 제공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설마병’에 취해 있는 사이 북한은 집요하게 남쪽을 향한 비수를 갈아왔다. 특히 지난해부터 북한군의 동태는 예년과 사뭇 달라지기 시작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군사훈련 참관 횟수가 부쩍 늘어난 게 그 하나다. 2008년까지 10년 동안 그는 모두 5차례만 군사 훈련을 참관했는데 지난해 4차례에 이어 올 들어 또 4차례나 훈련을 참관했다. 그것도 종전과 달리 ‘육해공군 합동’ 또는 ‘종합기동’ 등 대규모 군사훈련이다. 김정일은 올 1월 벽두 평양 근처의 ‘서울류경수 제105탱크사단’을 시찰했다. 6·25 때 서울에 최초로 진입한 부대다. 조선중앙TV에 방영된 시찰 장면을 보면 탱크들이 가설한 남한 지형을 위풍당당 진격했다. 춘천~부산 간 중앙고속도로 374㎞와 김해, 전라남도와 호남고속도로, 부산, 창원까지 종횡무진 누볐다. 김정일의 해군 관련 행사가 유독 많았던 점, 군수 분야를 담당하는 주규창 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의 김정일 수행 횟수가 작년부터 부쩍 늘어난 점도 특이한 대목이다.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던 북한의 심상찮은 조짐들을 남쪽은 ‘설마병’ 탓에 간과한 것이다.

한반도는 지금 긴장의 에너지로 팽팽하다. 당장 대형 확성기를 둘러싼 남북 간 군사적 공방이 우려된다. 국지적 충돌이 확대될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는 일촉즉발의 순간이다. 전쟁만은 결코 피해야 되지만, 전쟁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겁먹고 물러선다면 우리는 전쟁의 볼모로 잡혀 오랫동안 불안에 떨어야 할지 모른다. 거듭 확인된 북한의 도발 의지가 그걸 일깨워주고 있다. 이번만은 북한의 도전에 후퇴해선 안 된다. 그들의 착각과 오판을 바로잡아줘야만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필요한 게 국민들의 일치된 결의다. 지금은 한마음으로 대응할 때지, 누구 탓이냐를 따질 때가 아니다. 쓸데없는 논란은 전방의 전열을 흐트러뜨릴 뿐이다. 더구나 이번 사태를 부른 ‘설마병’은 모두의 책임 아니던가.

허남진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