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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주부들 "한국 남자들 결혼하니까 싹 변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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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2001년 마지막 토요일 오후, 서울 덕수궁에서 외국인 여성 네 명이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모였다.

나이도 국적도 각기 다른 이들에겐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한국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는 것.

'한국인 남편을 둔 외국 여성들의 모임(ISA:Inter-cultural Spouses Association)' 회원들이다.

'한국인 남편을 둔 외국 여성들의 모임'은 2000년 3월에 만들어졌다. 15개국 40여명의 회원으로 시작해 현재 일본, 러시아, 대만, 멕시코, 중국 등 26개국 1백여명의 회원을 둔 모임으로 커졌다. 현재 한국인과 결혼해 국내에 살고 있는 외국인은 85개국 출신 2만여명.

이중 96%가 여성이다. 국제 결혼이 점점 늘고 있는 만큼 회원수가 갈수록 늘어날 전망. 회원들은 가족 모임.파티 등 함께 모이는 자리를 마련해 서로 한국 생활 적응에 도움을 준다.

바자회, 벼룩 시장 등을 통해 기금도 모았다. 올해부터는 친목 외에도 법률이나 복지, 가정 문제에 대한 상담 등으로 활동의 영역을 넓혀갈 계획이다.

"김치와 된장국을 정말 좋아해요. 한국 요리도 이젠 못하는 게 없어요."

이 모임의 회장은 필리핀 여성 로웨나 델라 로사 윤(35)이다. 그는 여행사에 근무하는 지금의 남편을 필리핀 마닐라에서 처음 만났다.

"남성 중심 사회인 한국에서 한국 남자랑 살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주변에서 걱정했어요. 하지만 남편을 믿고 결혼했죠. 시부모님은 저를 보러 직접 필리핀에 오셨어요. 너무 멋진 분들이었어요. 물론 결혼 후엔 사정이 달라졌죠. 전형적인 한국 시부모와 남편으로 변한 것 같아요."

그는 아이를 낳은 후 그만두었던 직장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남편과 시부모는 집에서 살림 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맞벌이가 일반적이고 여성 대통령까지 둔 필리핀에서 온 그로서는 집안 일에만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한 영자 신문사에 다니다가 지금은 국정홍보처 해외홍보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젠 남편도 제가 일 하는 걸 인정하고 지원해줘요. 제가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 만큼 남편과 시부모도 새로운 상황에 맞춰가는 것 같아요. 한국에선 아직까지 남편이 집안의 왕이고 부인은 남편 뒷바라지를 하는 게 자연스럽지만 앞으로는 점점 변하리라 믿어요."

20개월 된 아들 매석이를 둔 독일인 아루나 페고(32)는 미군 부대에서 일하는 남편과 3년전 결혼했다.

그는 "며칠 전 처음으로 떡국을 만들어 시부모에게 대접했다"며 "한국의 주부로 사는 법을 하나 하나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제가 독일 사람이고 남편이 한국인이라고 해서 특별하다고 생각 안해요. 부부 사이의 문제는 성별이 달라 생기는 것 아닐까요."

새해를 맞아 결혼 10주년이 되는 넬리와티 부디만(42)은 인도네시아가 고향이다.

그는 "아이들이 두 개의 문화, 두 개의 언어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것이 국제 결혼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2학년인 딸 보영이와 7살 난 아들 재환이는 굳이 영어 학원에 다닐 필요가 없어요. 제가 애들에게 영어로 말을 걸거든요. 농담으로 엄마한테 학원비 내라고 말하죠."

미국 여인인 로나 버틀러(34)는 영어를 가르치러 왔다가 한국 남자를 만나 올 해로 결혼 4년째를 맞았다. 그에게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시댁 식구들과 친해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처음엔 마음 고생이 많았죠. 하지만 제가 의붓 딸 희정(11)이도 잘 돌봐주고 집안 행사 때도 빠짐없이 참석하는 모습을 보시더니 시부모님도 이젠 절 인정해 주세요."

그는 "다만 외국인 엄마를 두었다는 것 때문에 희정이가 힘들어 할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한국 친구들에게 한국 남자랑 결혼했다는 말 안해요.'어떻게 만났냐'부터 '뭘 먹고 사느냐'까지 질문을 너무 많이 하거든요. 우린 그냥 보통 한국 부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남편이 가끔 늦게 들어오면 다투기도 하고, 쌀밥에 김치.멸치.된장찌개 먹고 살거든요."

"어른을 존경하고 정이 많아 서로 잘 도와주는 건 한국 사람들의 좋은 점이죠. 하지만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심은 부족한 편이에요. 그래서 한국 사람과 결혼한 외국인 배우자들은 한국에 살면서도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많이 갖게 되는 것 같아요. 또 비자 문제 등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구요. 새해에는 한국이 좀 더 열린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2002년을 맞는 외국인 아내들의 공통된 소망이다.

ISA 인터넷 홈페이지:

김현경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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