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기업경영과 경영자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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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삼성전자 전.현직 임원에게 경영 부실 책임을 물어 거액의 배상 명령을 내린 수원 지방법원의 판결은 지난 반세기의 한국적 경제환경과 기업경영 풍토를 되돌아보고 개선 대책을 다루는 논의의 시발이 돼야 한다. 오너와 경영진은 물론 소액주주 모두 다시 한번 글로벌 시장경제 하에서 투명성을 확보하고 동시에 기업경영의 요체인 자율.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최선의 방책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고뇌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번 판결에 대해 참여연대와 회사 양측이 항소의 뜻을 밝혀 결과는 두고보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기업경영의 부정적 기존 행태에 대해선 확실한 경고의 의미를 갖고 있다. 선진국에선 이사들의 권한이 큰 반면 회사에 경영 부실을 끼쳤을 때의 책임 또한 크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이사회가 대주주의 지시를 수행하는 거수기라는 자조가 나올 정도로 미흡했던 점은 부인하지 못할 현실이다. 따라서 이번 판결은 형식적으로 운영돼 온 기업 이사회가 명실상부하게 회사와 주주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경영 원칙을 강조, 이사회의 체질 개선에 새 바람을 불어넣을 만하다.

그러나 경영 현장에선 문제도 많아 여러가지 다툼의 요소를 남기고 있다. 삼성전자측은 이천전기 인수에 대해선 당시 상황에서 새로운 분야에 진출키 위한 경영전략적 판단이었으며 외환위기로 예상치 않은 결과를 빚게 됐다고 주장한다. 삼성종합화학 주식의 계열사 매각과 관련해 비상장사의 자산가치 평가는 논란의 소지를 지닌 게 사실이다.

또한 9백여억원의 배상금도 개별 이사들로는 감당키 어려운 금액으로 판결이 법리에 치우쳤다는 평가도 없지 않다. 재계는 판결이 업계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해 벌써부터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불확실한 경영환경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갖지 못한 채 기업경영의 책임을 너무 포괄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데 대한 비판이다. 경영에서 요구되는 신속한 의사결정을 막고 보신주의를 확산시킬 것이라는 걱정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모든 일을 '경영적 판단'이라며 두루뭉실하게 넘어갈 수는 없다.

그러나 이미 사법부는 외환위기와 관련된 정부의 당시 정책 책임자들에 대해 '정책적 결정은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그렇다면 국가 경영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으면서 기업 경영에 대한 책임은 법적으로 지우는 게 타당한지 연구해 볼 사안이다.

1997년 말 외환위기를 전후해 한국의 기업 환경에는 큰 변화가 몰려 왔다. 부실.방만 경영과 족벌 체제의 폐해가 겹쳐 국가 부도의 불행을 가져왔지만 그것이 바로잡아야 할 절실한 해결 과제로 각인된 것은 정작 위기를 헤쳐나오면서부터였다. 말하자면 상당부문이 과거의 관행이었다. 그동안의 상황 이해는 건너뛴 채 결과에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게 온당한지 의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자본금 1천억원 이상의 상장기업에 대한 주주 대표소송 여건이 완화되면서 유사 소송이 번질 가능성은 크다. 글로벌 기준에 맞는 기업 경영처럼 절실한 과제는 없다. 그렇다면 향후의 논의와 판결도 우리의 기업 경영에서 부정적 잔재를 털어내고 진일보하는 계기를 마련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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