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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 칼럼] 나의 소원 필요하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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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어느 열성 독자가 마크 트웨인한테 자신이 그와 꼭 닮았다는 서신과 함께 사진을 보냈다. 이에 작가가 회답을 했다. "정말 똑같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당신의 사진을 보고 면도를 했으니까요." 대문호의 익살이야 한번 씩 웃어버리면 그만이지만 현실에서는 도무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역대 정권의 '말기 증후군'을 보노라면 정말 똑같다는 느낌이 든다. 무슨 '레임 덕'이니 누수현상이니 하는 고상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3공과 5공 정권 아래서는 비리의 자행과 은폐도 '군사적'이었다. 그래서 그 진상이 부분적으로나마 밝혀지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6공과 문민정부 및 국민의 정부에 들어와서는 숱한 비리들이 정권 당대에 곪아 터졌다.

*** 비리사건 잠복기 짧아져

민주화 투쟁의 공이든 권력 내부의 단속 소홀이든 화근의 잠복기가 짧아졌다는 점에서 일단 환영할(?) 일이다. 막무가내의 폭력이 줄어드는 반면 죄상은 한층 교활하고 지능적으로 변했다.

깡패마저 술집 마담이나 도박장 지배인 대신 정계와 권부의 실세들과 형님.아우하며 지내는 판이니 말이다. 특히 대통령 친인척의 비리 연루 소문이나 측근들의 부패 행위는 과거의 사건을 복사하거나 과거의 사진을 놓고 면도해도 좋을 만큼 똑같다.

지난 24일 본지가 고른 2001년 국내 10대 뉴스를 훑어봤다. 인천공항 건설과 저금리 현상을 빼곤 한결같이 혈압 오르는 내용이었다. 교육과 건강보험은 '준비된 대통령' 공약이 무색하게 죽을 쑤고 말았다.

언론사 세무조사의 진짜 과녁이 무엇인지 여전히 의문이며, 새파란 친구들이 권력을 끼고-아니면 권력이 이들을 앞세워-증시와 금융을 흔들었던 무슨 놈의 게이트 시리즈에는 구토가 치밀어 오른다. 다수 국민의 박수를 모을 수도 있었던 남북문제마저 정권의 초조와 과공(過恭)으로 애초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

국외 10대 뉴스의 톱은 단연 9.11테러와 그 후속 전쟁이었다. 모두들 혁명은 전 세기의 유물로서 새 세기의 초대장에는 빠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오해였다.

21세기 벽두를 강타한 테러 광기와 반테러 응징이 인류의 장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는지 아무도 자신하지 못한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는 부패 정권이 퇴진했고, 아르헨티나에서는 외세의 꼭두각시 정부가 경제 폭동으로 퇴출당했다. 혁명은 아직 유효하고, 그 효과는 이렇게 부패 근절과 외세 청산으로 나타나고 있다.

세계경제의 불황과 세계화 반대 시위는 그 상관관계가 인정되지만, 지놈 지도를 완성한 인간이 돼지 구제역과 광우병 공포에 떠는 현실은 그야말로 한 편의 개그가 아닐 수 없다. 정작 떨 일은 문명이 충돌로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문명을 만든 지혜 때문에 와해된다는 참담한 역설인데 말이다.

국외 뉴스를 좌우할 만큼 우리의 국력이 실하지 못하다면 국내 뉴스라도 낭보를 전해야 한다. 신문의 관행으로 보아 내년에도 이런 특집을 마련할 것이며, 현정권으로서는 이제 마지막 기회가 된다.

우리의 눈이 못 미쳐 그렇지 정부는 온갖 '조커 카드'를 쥐고 있다.정부 의도대로 경기를 살릴 수는 없겠지만, 확고한 의지로 공명선거를 치를 수는 있다. 정부가 모든 부정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성역 없는 수사로 비리를 캐낼 수는 있다.

정부 마음대로 축구시합에서 이길 수는 없겠지만, 거기 화합의 멍석은 깔아줄 수는 있다. 그 막강한 카드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내년 10대 뉴스의 내용과 편집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 화합멍석 깔 마지막 기회

무시로 폭탄이 터지는 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목사와 신부와 랍비가 토론을 벌였다. 아무리 다투어도 결론이 나지 않자 천사가 나섰다. 어떻게 해야 평화가 오느냐는 질문에 개신교 목사는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가톨릭 신부는 무엇보다도 개신교 투사들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절망한 천사가 유대교 랍비에게 방법을 묻자 그는 "목사님과 신부님의 소원만 들어주신다면 저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상대방의 독선만 없다면 합리적 정치를 펴리라는 여야의 싸움이나, 규제와 자율을 놓고 승강이하는 정부와 기업의 다툼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의 소원에 따라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한다면 나의 소원 따위가 무엇에 필요하랴?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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