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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 스위스 비밀계좌 열었다 … 4개 기업·사주 6224억 비자금 적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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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돈을 해외로 빼돌려 탈세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세청이 칼을 빼들었다. 해외에서 얻은 소득을 신고하지 않고 탈세한 4개 기업과 사주를 적발해 총 3392억원의 세금을 물렸다. 일부에 대해선 검찰 고발도 할 계획이다.

국세청은 25일 세금 규제가 느슨한 해외 조세피난처 등에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기업자금을 불법 유출한 혐의가 있는 4개 기업과 사주를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이 탈루한 소득은 6224억원에 달했다. 이번 조사에서 국세청은 사상 처음으로 스위스·홍콩·싱가포르에 개설된 14개 계좌의 입출금 내용과 2009년 12월 말 기준 계좌 잔액(1억3000만 달러)을 확인했다. 국세청 이현동 차장은 “지난해 11월 역외탈세 추적 전담센터를 설립해 6개월간 국제공조를 통한 강도 높은 조사를 벌인 결과 탈세 사실을 적발했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적발된 업체는 제조업체, 금융업체, 도매·무역업체, 서비스·투자자문업체로 다양하다. 이들의 탈세 수법은 지능적이고 치밀했다.


국세청에 따르면 제조업체인 A사의 사주 a씨는 해외에 설립한 현지법인과 페이퍼 컴퍼니(실체가 없이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를 이용, 매출 단가를 조작하거나 용역대가를 허위로 지급하는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해 스위스의 비밀계좌에 숨겼다. a씨는 이 돈을 5~7단계에 걸쳐 세탁한 뒤 버진아일랜드·라부안 등에 설립한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국내외에 재투자해 얻은 소득을 빼돌렸다. 그는 또 세금을 내지 않고 자녀에게 재산을 상속해 주기 위해 조세피난처에 있는 신탁회사를 이용하기도 했다. 국세청은 a씨에게 종합소득세 등 2137억원을 부과했다.

이와 별도로 A사는 해외 현지법인과 관계사가 해외 특수목적회사(SPC)에 투자하는 것처럼 속여 자금을 유출한 뒤 미국에 설립한 페이퍼 컴퍼니 명의로 고급주택을 구입하고 사주와 가족들이 사적으로 사용하게 하다 적발됐다.

서비스·투자자문회사인 B사의 사주 b씨는 자회사가 소유한 주식을 제3국을 경유한 옵션 거래로 원가보다 낮은 가격에 산 뒤 해외에서 팔아 차익을 빼돌렸다가 적발됐다. 국세청은 b씨가 이런 수법으로 해외에서 올린 소득 310억원을 찾아내 194억원의 세금을 물렸다.

금융업체인 C사는 사주가 외국에서 사적으로 사용한 비용 등 714억원을 회사의 투자손실 처리했다가 적발됐다. 이 회사는 국내에서 자금을 모아 미국의 펀드에 투자하는 것처럼 위장한 뒤 복잡한 과정을 거쳐 국내에서 입은 손실로 처리하는 방식으로 세금을 탈루했다.

이현동 차장은 “조사 결과 계획적·지능적 역외탈세가 확인됐다”면서 “역외탈세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끝까지 추적해 과세하고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겠다”고 말했다. 국세청은 역외탈세를 뿌리 뽑기 위해 역외탈세 추적 인프라를 더 구축하고 임시 특별팀 형태로 운영하던 역외탈세 추적 전담센터를 상설조직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부처 간 협의를 통해 ‘해외 금융계좌 신고제’와 ‘해외 정보 수집요원 파견제’를 도입할 방침이다. 해외 실명제로 불리는 해외 금융계좌 신고제의 경우 기업의 투자의욕을 해칠 수 있어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기획재정부와, 역외탈세를 막기 위해 조속히 시행해야 한다는 국세청의 입장이 엇갈려 왔다.

김종윤 기자

◆조세피난처(tax haven)=법인의 소득 전부 또는 상당 부분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국가나 지역. 모든 금융거래의 익명성이 철저히 보장되기 때문에 탈세와 돈세탁용 자금 거래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조세피난처는 바하마, 브리티시 버진아일랜드, 라부안(말레이시아) 등이다. 2000년 관세청의 조사에 따르면 840여 개의 국내 기업이 라부안에 1100여 현지법인 또는 지사를 설립해 운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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