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악에 속한 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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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이 세상에는 악(惡)이 존재한다. 그 악은 개인 차원으로도, 국가적 차원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그 공통적인 특징은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인간 생명을 마음대로 훼손하고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이런 본원적인 악은 역사를 통해 반복돼 나타나고 있다. 독일 나치는 유대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쓰레기로 취급했다. 그랬기 때문에 쓰레기 태우듯 태연한 마음으로 수백만 명을 독가스실로 보냈다. 9·11 테러범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성전(聖戰)이라는 명목 하에 1000명이 넘는 일반 시민에게 테러를 가하고도 죄의식조차 없었다. 스탈린의 학살이나 일제의 군국주의 체제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북한이 이런 악에 속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비단 이번 천안함 공격이나 KAL기 폭파 때문만이 아니다. 그 체제는 자기 국민조차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수백만 명의 백성이 굶어죽어도 눈 깜짝하지 않는다. 북한 강제수용소의 실상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사람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르고도 아무 감정이 없는 것, 그것이 본원적인 악의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착각하고 있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이성과 합리, 감정 속에서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우리가 매번 똑같이 당하는 것은 ‘그들도 인간일 텐데…’라는 가정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그 기반이 바로 ‘악’이다.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말은 맞다. 그러나 그 민족 가운데 악에 속한 자들이 지금 북한을 지배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악을 악이라고 부르는 것을 꺼렸다. 누구도 이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악의 포용만을 얘기했고,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말했다. 지식인인 체하는 자일수록 더욱 그랬다. 악을 포용하는 것이 마치 큰 정치인이 되는 듯 착각했다. 햇볕정책은 그런 것이었다.

여러 나라 정부가 성명을 발표하고, 미 의회는 규탄안을 채택하는데 당사자인 우리 내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나온다. 북한의 잘못을 감싸주고 변명해 주는가 하면, 오히려 한국의 대통령과 군인들을 비난하고 있다. 왜 제대로 방비를 못하고 당해서 북한을 곤경에 빠뜨리게 만드느냐는 논리다.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실패해 감옥에서 죽음을 맞은 독일 신학자 본훼퍼는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라고 말했다. 지금 우리 내부에는 북쪽의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정도를 넘어 오히려 악의 편에 선 자들이 우글거린다. 어떻게 이렇게 병들었나? 아무리 경제가 발전하고 민주주의가 만개한들 이런 나라가 제대로 갈 수 있을까?

경제 제재를 한들 북한 지배자들은 끄떡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죄 없는 주민들의 고통만 더 커질 뿐이다. 이미 유엔 제재를 받고 있는 그들에게 유엔이 다시 결의를 한들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우리가 정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이 제재보다, 규탄보다 더 절실한 것이다. 먼저 북한의 지배자들은 악의 세력이라는 점을 우리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그 악은 반드시 제거돼야 한다는 점에 의견일치를 보아야 한다. 악의 세력은 언제나 허장성세로 위장하고 있다. 그러나 진짜 겁쟁이는 바로 그 악의 세력이다. 김정일의 중국 나들이 광경을 보라. 왜 비밀에 싸여 숨어다녀야만 하는가? 그만큼 두렵기 때문이다. 그의 위장을 벗기면 한낱 병들은 70대 가까운 노인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전쟁은 피해야 한다. 교묘한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우려면 우리가 뱀보다 더 지혜로워져야 한다. 그러자면 북한 사람들 스스로의 힘으로 악을 제거하는 운동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북한 체제가 내부로부터 전복돼야만 통일의 기회가 올 때 중국의 간섭을 그나마 막을 수 있다. 미 인권차관보 마이클 포스너는 “북한에도 소련 시대와 같이 그 가혹한 체제에 도전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들에게 숨쉴 공간을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삐라를 두려워하고, 확성기 방송을 두려워하는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는 안으로는 악의 동조자들을 고립시키고, 밖으로는 악의 세력을 뒤엎는 운동을 지원해야 한다.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