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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괴문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주간지(週刊文春) 기자 출신으로 자신이 수집한 괴문서들로 개인문고까지 만든 일본의 '괴문서 전문가' 롯카쿠 히로시(六角弘)에 따르면 괴문서는 세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출처가 분명하지 않다. 둘째, 분명한 목표물이 있다. 마지막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뿌려진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 괴문서들의 신빙성에 대해 "1960년대에는 거짓이 70~80%이고 진실이 20~30%였으나 90년대 초반에 50대 50으로, 그리고 현재는 80~90%의 진실에 10~20%의 거짓이 섞이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과거에 비해 신뢰도가 부쩍 높아졌다는 얘기다.

괴문서는 해프닝으로 끝날 때가 많지만 때로 엄청난 파문을 부른다.

일본 정계를 호령하던 거물 정객 가네마루 신을 몰락시킨 대형 뇌물사건 '도쿄 사가와규빈 파문'도 출발점은 91년 여름 장문의 괴문서가 경제계에 나돌면서부터였다.

택배회사 사가와규빈의 부정을 낱낱이 폭로한 뒤 '이상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기록한 것으로, 어딘가에 제출할 목적으로 만든 게 아니다'고 글을 맺는 이 괴문서가 반년 이상이나 신빙성을 갖고 나돌자 급기야 도쿄지검 특수부가 뇌물의혹 수사에 착수하게 된다.

59년 도쿄도 지사 선거에 출마한 아리타 하치로 전 외무장관은 '괴문서 폭탄'에 맞아 낙마했다. 누군가가 '전직장관 부인 요정마담 일대기'라는 괴문서를 만들어 뿌렸던 것이다. 부인이 요정에서 일한 전력을 에로틱하게 묘사한 괴문서 탓에 당선이 유력했던 아리타는 무려 17만표 차이로 낙선했다.

남의 나라 이야기만 할 게 아니다.우리 사회도 문건이니 리스트니 하는 괴문서 파동에 시도 때도 없이 휘말린다. 정보소통 수단이 발달한 덕분에 굳이 종이문건으로 만들지 않아도 얼마든지 불특정 다수에게 퍼뜨릴 수 있게 됐다.

'언론장악 문건'이 기억에 새롭고, 정태수 리스트.최순영 리스트가 인구에 회자되다 사그라들었다. 지난해엔 민주당 인사들이 외교부에 압력을 가했다는 '이인제 괴문서'가 잠시 화제였다. 이용호 리스트.정현준 리스트가 아직 잠복해 있고, 진승현 리스트는 현직 차관의 수뢰의혹으로까지 번진 '현재진행형'이다.

괴문서의 영양분은 광범위한 불신(不信)이다. 괴문서를 퇴치할 약은 진실이나 정직성일 텐데, 우리 사회 상층부엔 정직한 사람이 너무 적다고 믿는 이들이 너무 많아 문제다.

노재현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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