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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위기의 공권력, 대통령이 나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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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유럽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김대중(金大中)대통령 앞에 놓인 내치(內治)는 크게 헝클어져 있다. 1백4억달러의 수주 실적을 올렸다는 세일즈 정상외교, 한국과 유럽연합간 격년제 정상회담 개최 합의, 아시아 국가원수로는 처음인 유럽의회 연설 등 외치 쪽은 활발했다.

그러나 순방 11일 동안 공권력과 인권 쪽에선 개탄과 어이없음, 충격과 분노를 일으키는 일들이 잇따랐다. 수지 金 피살 조작사건의 내사중단 혐의로 이무영 전 경찰청장과 김승일 전 국정원 대공수사국장의 구속, 신승남 검찰총장 탄핵소추안의 개표 불발과 정치권 공방,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의 타살 증언에 이어 신광옥 법무부 차관의 진승현 게이트 연루 의혹등이 속속 드러났다.

정리와 매듭짓기를 잠시도 미룰 수 없는 공권력 위기상황이다. 먼저 辛차관이 지난해 8월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시절 1억원을 받았다는 의혹은 신속히 밝혀져야 한다. 공직기강과 사정(司正)업무를 총괄하는 대통령 참모의 권력 탈선 의혹이라는 점에서 검찰 수사에 통치권 차원의 배려가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나돌 수도 있다.

그런 엄청난 부담이 걸려 있다 해도 사건수사의 정면돌파, 성역없는 추적만이 DJ정권이 내건 깨끗한 정부의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건질 수 있고 땅에 떨어진 공권력의 위신을 그나마 곧추세우는 전기가 될 수 있다.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지적해온 金대통령의 엄정한 공권력 관리 의지가 시험대에 올라 있는 것이다.

수지 金 피살 조작과정, 崔교수 타살 의혹에는 과거 강압정권 시절의 어두운 그림자가 배어 있다. 이번 유럽의회 연설에서 '인권과 평화라는 세계 가치의 수호자'라는 평가를 들었던 金대통령으로선 당연히 진상규명에 힘을 쏟고 국가를 대표해 해원(解寃)차원의 사과도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국가 최고 정보.수사기관 내부에서 드러나는 음해.기강해이.책임전가의 비뚤어진 모습을 빨리 정돈해야 한다. 수지 金 사건을 둘러싼 국정원 간부와 전직 경찰총수 간의 책임전가 공방, 진승현.정현준 게이트와 관련한 국정원 내부의 암투설, 그리고 辛차관이 "나를 모함하는 세력이 있다"며 제기하는 갈등설까지 퍼지고 있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권력기관 전체가 어지럽게 꼬여 있다.

권위와 신뢰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이런 공권력으로는 난마(亂麻)같은 임기말 국정을 金대통령이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공권력을 반듯하게 쇄신하기 위한 金대통령의 특단의 관심과 비장한 결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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