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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포럼] 나, 또… 절망할까 말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공적자금 7조원을 빼돌렸다."

이처럼 황당한 거짓 내지 지레짐작이 없다. 7조원 재산을 빼돌리거나 감춰두었다 해도 그렇다.

감사원이 지난 주 공적자금 감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언급한 '7조원 재산'의 실체는 다음과 같다.

예금보험공사는 기업.금융기관 부실 책임자들의 재산을 추적해왔다. 그러나 국세청 전산자료는 얻지 못했다. 국세청은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어렵다고 했었다.

그러다 감사원 감사가 시작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국세청뿐 아니라 증권예탁원.행정전산망.토지전산망 전산자료까지 다 돌렸다.

그결과 예보는 부실책임자 재산자료를 '더' 손에 넣었다. 대부분은 2000년 말 자료, 일부는 1999년 말 자료였다.

이것이 '은닉 재산'이나 '빼돌린 공적자금'인가□ 국세청 전산망에 올라 있는 재산이?

예보는 이제 7조원의 재산 하나 하나에 대해 압류할 수 있는 것인지, 돈이 되는 것인지, 선순위 담보로 잡혀 있지 않은지 등을 가려 나가면 될 뿐이다. 거기다 예보 관계자에 따르면 7조원 중 약 2조6천억원은 비상장기업 주식, 또 다른 약 2조6천억원은 상장기업 주식이라 한다. 주식이 휴지인지 아닌지부터 봐야 하고 따라서 7조원 중 얼마나 건질 수 있는지도 두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예보나 부실책임자들을 두둔하기 위해 하는 소리가 결코 아니다. 공적자금에 별 문제가 없다고 하는 소리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대로 해놓고 공적자금을 제대로 파헤쳐야지, 전화 몇통만 더 해보고 자료를 한번 더 읽기만 해도 알 일을 팽개친 채 흥분부터 하다가는 문제의 본질은 놓치고 부작용만 양산하겠기에 하는 소리다.재산 해외도피는 완전히 다른 얘기다.

벌써 노동계.농촌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소리가 들린다.

7조원씩이나 빼먹었다는데 우리만 왜 당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자칫 잘못되면 정부의 권위도,사회의 규율도, 시장의 원칙도 없이 만인의 만인을 위한 거대한 도덕적 해이가 나라를 덮칠 판이다.

그렇지 않아도 공적자금 문제의 몸통은 바로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사회 모두가 지금껏 빠졌던 '총체적인 도덕적 해이'다.

정치권도, 정책 담당자도,금융기관 임직원도, 기업 경영진도, 근로자도,투자자도 다들 공적자금이 '혈세'라고 하면서도 정말 '내 돈'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말 내 돈 같았으면 은행 퇴출에 정치적 고려가 끼어들었을까.

그 중요한 예금보험공사.자산관리공사 최고책임자로 금융 비전문가를 앉혔을까.

지난해 4.13 총선을 치르며 국가부채에 대한 여야의 소모적 정쟁 속에 2차 공적자금 투입시기를 놓쳐 규모를 더 키웠을까.

계나 마찬가지인 신협 출자금도 공적자금으로 메워주도록 법을 고치고, 투자자 책임인 실적배당상품 손실도 물어주었을까.

대우차 매각을 그리 반대하며 공적자금을 더 쏟아붓게 했을까.

부실기업 정리를 촉진하기 위한 '기업도산 3법' 개정을 아직도 못할까.

이런 논의에 집중해 잘잘못.책임을 가리고 무엇을 배워 무엇을 반복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냉정하게 따지기에도 시간이 모자란 판이건만 대번에 "내각은 총사퇴하라"(한나라당)는 성명을 내고 "해도 너무 한다"(JP)고 개탄하며 불이나 더 지르면 그만일까.

감사원 보고서나 제대로 다 읽어 보았을까.

이번에도 환란 때처럼 속죄양 몇명 만들어 놓고 정책 판단을 사법처리 대상으로 삼으려 할까. 기껏 은행 계좌나 뒤지지 않을까.

나는 다시 한번 이 사회에 대해 절망할까,말까 생각 중이다. 공적자금을 다루는 이 사회의 '수준'을 놓고서다. 공적자금 조성.집행.회수가 다 그렇더니 감사원 감사를 놓고 온나라가 '끓고'있는 것 역시 그러하다.

김수길 경제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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