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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 (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부천서 性고문사건

2. 야만적 행위

시위 후 경찰에 연행된 피의자들이 수백 명이나 돼 인천지역 경찰서마다 연행자 조사로 복잡한 상황이었다. 검찰은 연행자들의 시위참가 정도에 따라 등급을 분류해 신병처리 방침을 지휘하느라 무척 바빴다.

현지 상황파악을 위한 대검의 전화까지 연이어 걸려오다 보니 인천지검 특수부 검사들은 몸이 두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당시 인천지검은 공안부가 없는 상태여서 특수부가 공안사건도 담당하던 상황이었다.

연행자 대부분을 훈방했지만 1백29명을 구속하고 22명을 즉결에 회부한 큰 사건이었다.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5.3 인천사태'라고 불렀다. 대검은 거의 매일 야근을 하는 인천지검에 수고한다고 격려하면서 인원 등을 지원해 주겠다고 하였으나 나는 "우리 청 인원으로도 충분하다"고 거절했다.

5.3사건 연행자 처리가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이었다.'시위에 가담한 서울대생 권인숙양을 조사하던 부천경찰서 문귀동(文貴童)경장이 權양을 성 고문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나도 모르게 "드디어 터질 것이 터졌구나"하는 탄식이 나왔다.文경장이 權양을 밤늦게 조사하면서 옷을 벗기고 성적 모욕감을 주는 언동을 하고 성기를 꺼내 權양의 엉덩이에다 몇 번 접촉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예상대로 그 사건에 대한 반향은 폭발적이었다.모든 종교.시민단체들이 "경찰의 만행을 철저히 조사해 엄벌하라"고 요구했고 언론도 이를 크게 보도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서슬 시퍼런 군사독재정권 자체에 대한 비판이 여의치 못한 상황에서 한 경찰관의 추악한 범죄를 질타하면서 정권에 타격을 주기에는 아주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고소장의 내용과 달리 피해자가 마치 조사중에 강간을 당한 것 같이 과장된 소문이 전파되고 있었다. 그리고 공안기관과 정부의 홍보부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성(性)을 도구로 한 운동권 학생의 공안기관 무력화 작전"이라고 선전하는 등 이 사건에 대한 공방이 대단했다.

더구나 이 사건이 경찰서 조사실이라는 은밀한 장소에서 일어났고 경찰은 그들의 명예를 걸고 이 사건을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이 사건의 앞날은 험난할 것으로 예상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權양의 고소장이 인천지검에 접수됐고 나는 김수장(金壽長.전 서울지검장.변호사)특수부장에게 이 사건을 배당했다.

그리고 金부장에게 "지금의 상황과 사건의 성격상 그리 급하게 서둘러 수사에 착수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는 내 의견을 전달했다.

그런데 7월 4일 아침 김성기(金聖基)법무부장관의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권인숙 사건을 왜 빨리 수사하지 않고 수수방관하느냐"며 신경질을 내는 것이었다.

나는 "사건 성격상 피해자의 명예문제도 있고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금명간 경찰의 맞고소가 있을 것이 분명해 여러 가지로 생각중"이라고 설명을 했다.

金장관은 "어떻든 빨리 내사에 착수하라"고 지시했다.나는 "경찰이 무고죄로 맞고소를 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그것은 사태해결에 도움이 안될 것 같다"고 건의했다.

金장관은 "경찰에서 권인숙을 명예훼손과 무고로 맞고소를 하면 검찰이 고소장을 접수해 주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고 물었다.

'민원서류인 고소장 접수 여부를 왜 장관이 검사장에게 미리 묻는지. 그것도 경찰이 제출하는 고소장에 대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金장관의 전화가 있은 지 2시간도 지나지 않아 劉모 경기도경 국장과 수사과장이 찾아왔다.

이들은 "자체조사 결과 '성 고문 주장'은 터무니없는 허위사실이고 경찰을 무력화하려는 것이니 권인숙을 무고 등으로 맞고소를 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았다"며 내 의견을 물었다.

"당신들 경찰이 맞고소하기로 결정해 고소장을 접수시킨다면 민원서류이니까 접수하지 않을 수 없다.그러나 아직 성고문 주장의 진위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맞고소는 바람직하지 않으니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유쾌하지 못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김경회 <前 한국 형사정책 연구원장>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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