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새한 출신 8총사 ‘맨땅 헤딩’… FPCB 접착시트 최강자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7면

일감이 밀려들면서 이녹스의 공장은 요즘 24시간 가동된다. 장경호 사장(오른쪽에서 둘째)이 방진 작업복을 입고 작업장에서 직원들과 첨단 소재 생산 방법을 논의하고 있다. [조용철 기자]

“회사가 워크아웃에 들어갔습니다.”

2001년 초. 당시 새한기술연구소 장경호 연구원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식을 들었다. 불길한 소문이 돌긴 했지만, 설마 했었다. 의욕적으로 뛰어들었던 반도체 접착테이프의 개발이 거의 완료 단계였다.

“그래도 회사는 살 수 있을 거야, 기술도 우수하기 때문에 걱정 없어….”

그는 회사의 워크아웃 발표를 접한 뒤에도 긴가민가했다. 반도체 접착테이프란 반도체 리드프레임을 칩에 고정하는 소재다. 당시만 해도 이 작은 테이프를 한국 기업은 만들 줄 몰랐다. 모두 일본에서 수입했다. 연구진은 국산화를 위해 밥 먹듯 밤샘을 하며 연구에 매달렸다. 고생 끝에 거의 과실을 따 먹으려던 순간이었다. 이미 기계까지 발주한 상태였다. 그래서 회사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회사는 더 이상 투자를 할 수 없다고 연구진에 통보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장 연구원과 같은 연구팀의 장철규 연구원, 기획관리팀 박정진 과장, 필름영업팀 김신성 과장 등 8명이 모였다. 회사에서는 내로라하는 인재들이었지만 추진하던 사업을 접자 좌절이 컸다.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회사에 남을 것인가, 뛰쳐나갈 것인가. 각자 진로에 대해 고민을 털어놨다.

그리고 결론을 냈다. “나가서 도전하자”고.

국내 소재 분야의 신기원을 개척한 ‘8총사’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퇴직금을 다 쏟아부었지만 창업자금은 턱없이 부족했다. 대표를 맡은 장경호 사장은 아파트를 팔았다. 재무를 담당한 박정진 상무도 집을 내놨다. 다른 이들도 전세금을 뺐다. 이렇게 모은 6억원으로 2001년 11월 회사를 설립했다. 이녹스의 탄생이다(창립 당시엔 새한마이크로닉스였다가 2005년 상호를 바꿨다).

경기도 안성 동항산업단지에 땅 800평을 샀다. 여기에 컨테이너를 설치했다. 연구실 겸 공장이다. 가까운 오산엔 아파트를 한 채 빌렸다. 8명이 모두 합숙에 들어갔다. 인생을 건 도전이었다.

“술이라도 한잔 들어가면 처와 아이들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가족과 통화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더군요. 하지만 성공하지 못하면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죠.”

박 상무는 당시의 절박한 사정을 설명하면서 웃음을 지었다. 이녹스도 다른 초창기 벤처기업과 다를 바 없었다. 연구에 매달리고, 여기저기 거래처를 뚫는 데 주력했지만 2003년까지 매출은 한 푼도 생기지 않았다. 반도체 접착테이프 기술을 개발했지만 무명회사의 제품을 쓰겠다는 곳은 없었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반도체를 찾아 갔지만 문전박대가 일쑤였다. 좌절의 연속이었다. 걱정이 커졌다.

“이러다 꿈이 허망하게 날아가는 게 아닐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다 했나. 그해 컬러 휴대전화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기회가 왔다. 컬러 휴대전화기에는 연성회로기판(FPCB)이 2장 들어간다. 종전의 흑백 휴대전화기를 만들 때보다 두 배가 더 필요했다. 반도체 접착테이프 기술을 활용하면 FPCB 접착시트를 쉽게 개발할 수 있었다. 회로를 PCB에 붙여 주는 기술이다. 사업 방향을 돌렸다. 이 시장도 일본산이 독점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소재 공급이 여의치 않자 PCB 제조업체들이 이녹스의 제품에도 관심을 가졌다.

“기술력은 자신 있었습니다. 대기업에서 저희 제품의 성능을 시험해 본 뒤 바로 납품을 요구했습니다.”

이때부터 순풍에 돛 단 듯 본격적인 성장이 시작됐다. 최종 수요자인 휴대전화 생산업체도 이녹스 제품의 성능에 만족을 표시했다.

2006년에 상장을 했다. 드디어 ‘꿈은 이뤄진다’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숨어 있던 챔피언이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컨테이너를 들어내고 번듯한 공장을 만들었다.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강철은 쉽게 단련되는 게 아니다. 기쁨은 잠시였다. 이 시장이 커지면서 대기업들이 속속 뛰어들었다. 한화·SKC·두산·코오롱에다 대만 기업도 한국에 진출했다. 시장을 장악하던 일본 기업의 위세는 여전했다. 춘추전국시대로 돌아갔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2008년까지 소재 값이 무려 70%나 떨어졌다.

“하늘도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고생을 해서 이제 자리 좀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강한 기업은 위기 때 실력이 나타나는 법이다. 이녹스가 그랬다. 다시 대열을 추슬렀다. 당시 유럽이 환경보호를 중시하면서 브롬(Br)을 사용한 제품의 수입을 금지했다. 브롬은 인체에 해를 끼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인쇄회로기판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성분이다.

이녹스의 연구진이 다시 한번 일을 냈다. 브롬을 뺀 친환경 소재를 개발한 것이다. 더구나 가격을 30%나 낮출 수 있었다. 장 사장은 “성능은 좋으면서 가격도 싼 제품을 내놓으면서 업계에서 챔피언 소리를 듣게 됐다”고 말했다.

2008년 하반기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오면서 이녹스도 고전했지만 오히려 이게 약이 됐다. 친환경 제품을 앞세워 일본의 경쟁사를 밀어낼 수 있었다. 이녹스는 드디어 국내 시장 점유율 50%의 강자가 됐다. 지난해에는 수출입은행의 무역금융을 받아 수출에도 드라이브를 걸었다. 물량이 많지는 않지만 샤프·소니·히타치 같은 일본 기업에도 수출하기 시작했다.

장 사장은 “지난해부터 경기가 살아나면서 직원들이 9개월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면서 “이렇게 동고동락한 직원들이 있기 때문에 회사가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과실을 나눠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현장 반장급 이상 직원에게 스톡옵션을 줬다.

“일본 업체가 견학을 와서 놀라더군요. 어떻게 직원들이 2교대로 12시간씩 일을 할 수 있느냐고요.”

올해부터는 창업 때부터 목표였던 반도체용 접착테이프 시장에서도 히트작을 내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 이미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7%까지 늘렸다. 올해 말에 충남 아산에 총 3만3000㎡ 규모의 신규 공장을 준공한다.

창업 동지 8총사는 지금까지 한 명도 회사를 떠나지 않고 함께 일하고 있다. 이들은 올해를 반도체용 접착테이프 시장에서도 챔피언이 되는 원년으로 삼고 새로운 도전에 들어갔다.

글=김종윤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