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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스타일대로 꾸미는 맛, 페라리보다 쿨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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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호 12면

트릭(묘기)을 선보이는 픽시라이더팀 ‘서울 픽스드 기어’의 크루들. 주행과 트릭이 둘 다 쉬운 픽시는 90년대 스케이트 보드처럼 스트리트 문화가 됐다. 신동연 기자

“바퀴 달린 것 중 가장 쿨한 건 페라리도, 람보르기니도 아닌 픽시다.”
2008년 맥밀런 영어사전은 신조어 ‘픽시(Fixie)’를 인터넷판에 올리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사전은 픽시를 ‘페달이 뒷바퀴와 연결된 싱글 기어 자전거’라고 정의했다. 대체 픽시는 어떤 자전거이기에 꿈의 스포츠카보다 쿨하다고 하는 것일까.

브레이크 없는 원초적 자전거 ‘픽시’의 질주

‘픽시’는 ‘고정기어 자전거(Fixed Gear Bike)’의 애칭이다. 말 그대로 뒷바퀴와 체인이 고정돼 있다. 즉, 페달과 바퀴의 움직임이 항상 같아서 페달을 앞으로 굴리면 앞으로, 뒤로 굴리면 뒤로 달린다는 얘기다. 관성 주행 역시 불가능하다. 내리막길이라면 보통은 페달에서 발을 떼도 저절로 굴러가지만 픽시는 발을 떼는 순간 멈춰 선다.

이처럼 독특한 자전거가 유행이 되더니 ‘픽시’라는 섹시한 이름을 얻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열풍은 바다 건너 유럽, 호주, 일본을 찍고 한국에 상륙했다. 지난해부터 한 둘 보이던 픽시 라이더들은 최근 급격히 늘어 네이버 싱글기어 카페 회원만 2만 명이 넘는다.

앞으로 밟으면 전진, 뒤로 밟으면 후진
싱글 기어에 바퀴와 몸통만 남은 픽시는 옛날 자전거의 모습을 하고 있다. 1896년 페달을 밟지 않고도 구르는 ‘프리휠(freewheel)’ 자전거가 나오기 전까지 모든 자전거는 ‘픽시’였다. 하지만 프리휠이 일반화되고 27단에 이르는 다단기어 자전거까지 나오면서 픽시는 경륜에만 사용하는 특수 자전거가 됐다.

픽시는 단순한 디자인으로 패션 화보에도 단골로 등장한다.

이걸 부활시킨 건 뉴욕의 메신저였다. ‘미국판 택배 기사’라 할 수 있는 이들은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둘러맨 채 자전거를 탄다. 당연히 가볍고 빠르면서 고장 나도 쉽게 수리할 수 있는 자전거가 필요했는데 단순한 구조의 픽시가 알맞았다. 가난한 이들은 버려진 경륜자전거를 구하거나 중고 자전거를 단순하게 개조했다. 그리고 브레이크도 없는 경륜용 자전거에 몸을 싣고 옐로캡(뉴욕의 택시를 부르는 말) 사이를 묘기하듯 달렸다. 젊은이들은 날 듯이 질주하는 모습에 매혹됐다.

원초적인 자전거의 모습을 한 픽시의 디자인도 미니멀리즘 트렌드에 완벽하게 어울렸다. 전문매장인 ‘스펠바운드’를 운영하는 박익성씨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고 싶어서가 아니라 갖고 싶다면서 픽시를 사러 온다”고 했다. 또 부품을 최소화한 덕에 픽시는 원하는 대로 조립할 수 있다. 다른 자전거도 튜닝을 하지만, 픽시를 조립하는 건 바지·셔츠·재킷·신발 등을 골라 스타일을 완성하는 것과 비슷하다. 취향에 따라 프레임·림·타이어·핸들·안장 등 각 부분을 골라서 완성차를 만드는 것이다.

부품 몇 개 안 들어갔지만 경륜용을 사용하다 보니 가격은 만만치 않다. 150만원은 들여야 중간급으로 만들 수 있고, 조금만 욕심 부리다 보면 바퀴 하나에 100만원을 훌쩍 넘기기 일쑤다.

기능의 단순함도 픽시의 인기 요소다. 기계의 도움 없이 내 힘으로만 바퀴를 굴리는 건 맛보지 못했던 재미였다. 독일의 주간지 슈피겔은 “디카페인 커피만 마시다, 진짜 커피를 처음 맛보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끊임없이 바퀴를 돌려야 하는 만큼 운동량도 엄청나다. 근육을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근력이 커진다. 때문에 사이클 선수들도 훈련 삼아 픽시를 탄다. 유튜브에는 ‘투르 드 프랑스’를 7연패한 사이클 영웅 랜스 암스트롱이 픽시를 타고 텍사스 오스틴 시내를 질주하는 영상이 올려져 있다. 그래서 자전거 문화매거진 ‘바퀴(baqui)’의 오수환 편집장은 “예뻐서 타기 시작한 사람들은 힘들다며 아예 그만두거나, 푹 빠져서 다른 자전거가 지루해지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한다. 가수 구준엽씨는 후자다. 미니벨로를 타던 그는 처음엔 “힘든데 뭐하러 픽시를 타나”라고 했지만 지금은 일요일마다 강변을 달리는 픽시 라이더가 됐다. 함께 타는 매니저 홍성용씨는 “내가 움직이는 만큼 굴러가기 때문에 자전거와 몸이 하나 되는 느낌이 최고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있는 힘껏 페달을 구를 땐 최대 시속 70㎞까지 내달리지만 살살 밟을 땐 온순하기 그지 없는 픽시는 몸과 자전거의 일체감이 극대화된 자전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기능의 단순함은 위험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도로용 픽시는 앞바퀴에 브레이크를 달아 제작하지만 이를 떼고 운전하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돌발 상황에서 충분한 감속 효과를 볼 수 없어 라이더가 온전하게 제어하지 못 하면 사고 위험이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국내법엔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이 없다. 미국·영국·호주·일본에서는 브레이크 없는 자전거가 불법이다. 독일은 앞뒤 브레이크를 의무화했지만 특별히 규제하지 않다가 픽시 열풍이 불자 대대적인 단속에 나서기도 했다.

29일 한강 둔치에서 픽시 트릭 대회
값싼 자전거를 폼나게 타는 메신저의 질주는 ‘남과 다른 걸 보여주고 싶은 욕구’와 결합해 문화가 됐다. 젊은이들은 스케이드 보드나 그래피티, 힙합처럼 젊음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픽시를 탔다. 여기엔 트릭(묘기)도 한몫했다. 요즘 한강 둔치에선 자전거를 튕기고, 들고, 돌리는 등 트릭을 선보이는 픽시 라이더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2008년부터 픽시를 타다 홍대 앞에 ‘바이클립스’라는 매장까지 낸 정윤석씨는 원래 묘기 자전거인 BMX를 탔다. 그는 “BMX는 주행에는 매우 불편한 자전거지만 픽시는 주행과 트릭이 둘 다 쉬운 게 매력이다. 픽시를 한 번 타면 다른 자전거는 밋밋하게 느껴지는 이유다”라고 말했다.

픽시의 특징은 패션으로도 나타난다. 역시 ‘원조’인 메신저들의 차림새가 영향을 미쳤다. 일단 메신저백이다. 메신저들이 서류나 우편물을 넣어 다니면서 유행시킨 이 가방은 긴 끈이 달려 있어 가로질러 맨다. 바지는 둘둘 말아 올리거나 달라붙는 스키니진을 입는다. 펄럭이는 바지 자락이 체인에 감기는 걸 방지하기 위한 ‘안전 장치’가 패션이 된 셈이다.

또 픽시 동호회는 ‘끼’가 넘치는 이벤트들을 기획했다. 미국에선 열풍을 타고 그 주역인 메신저들이 아예 라이딩 팀을 만들었다. 샌프란시스코 메신저 모임인 ‘Mash SF’는 자전거 타는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뉴욕·로스앤젤레스·도쿄 등에서 상영회를 열었다. 월드 투어를 다니면서 전 세계에 팬도 거느리게 됐다.

지난해 런던의 픽시 모임은 ‘트위드 런(Tweed Run)’ 행사를 개최했다. 빈티지 자전거를 타고 100년 전 라이더 차림(트위드 재킷과 롤업 팬츠, 아가일 무늬의 긴 양말에 갈색 구두 등)으로 도심을 달리는 것이다. 오는 29일 서울 한강 둔치에서도 트릭 대회가 열린다. 전국에서 200명이 넘는 픽시 라이더들이 각종 자전거 묘기를 선보일 예정이다.

픽시는 ‘겉멋’이라는 오해를 받거나 자전거 동호회에서도 별종 취급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천편일률적인 자전거 문화에 다양성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다. ‘바퀴’의 오수환 편집장은 “한국의 자전거 붐이 동호회 중심으로 급속도로 번지면서 프로처럼 다 갖추고 자전거를 타는 게 일반이 됐다”며 “픽시가 겉모습으로만 한국에 들어왔다는 비판이 있긴 하지만 다양하고 자유로운 자전거 문화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면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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