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붉은 자본가] 쑹정환 하오하이즈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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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자체가 파멸을 불러오는 시대였다. 집에 돈이 많다는 이유로, 심지어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끌려갔다. 1966년부터 10년 동안 이어진 문화대혁명의 광풍은 수많은 중국인의 삶을 유린했다. 쑤저우(蘇州)에 살 던 고등학생 쑹정환(宋鄭還)의 가정 역시 그랬다. 36대째 의사 가업을 이어왔던 그의 가족은 홍위병들의 먹잇감이 됐다. 누군가가 ‘국민당에 협조한 봉건주의자’라고 허위 밀고하는 바람에 타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당시 홍위병들은 동네를 돌며 책을 불태웠습니다. 책이 많다는 이유로 박해를 당했지요. 우리는 스스로 책을 태웠습니다. 위기를 모면해야 했으니까요. 대부분 의서(醫書)였습니다. 우리가 태운 책 중에는 중의학 관련 희귀본도 많았지요. 골동품도 내다 버리거나 숨겨야 했습니다.”

상하이 근교 쿤산(昆山)의 사무실에서 만난 쑹정환(61) 하오하이즈(好孩子) 회장은 문혁 시절의 기억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중국인이라면 모두 겪었던 흔한 일’이라고 했다.

문혁 시절 홍위병의 핍박에 시달렸고, 지방으로 쫓겨가 육체노동을 강요당했던 ‘의사의 아들’은 지금 세계 최대의 유모차 업체를 이끌고 있다. 하오하이즈는 중국 유모차 시장의 약 80%, 미국 시장의 약 43%를 차지하고 있다. ‘유모차 대왕’으로 불린다. 그는 ‘해방둥이’다. 공산당이 중국을 ‘해방’시킨 1949년에 태어났다. 그러기에 그의 인생에는 현대 중국사가 녹아 있다.

● 수학 선생님에서 기업가로 변신했는데

“문혁 얘기를 더 해야겠다. 의사 가업을 잇겠다는 꿈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홍위병들은 ‘의사 지식인’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사춘기를 핍박 속에서 보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게 68년이었다. 졸업하자마자 농촌으로 쫓겨가 육체노동을 해야 했다. 그래도 책을 놓지 않았다. 어머니의 교육열 덕택에 꾸준히 공부를 했고, 73년 쑤저우대학에 갈 수 있었다. 수학을 전공했고, 대학 졸업 후 고향 쿤산의 루자(陸家)중학교 수학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 회사와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

“80년대 초 루자중학교는 작은 회사를 하나 운영하고 있었다. 전자레인지 공장이었다. 공장에서 번 돈으로 교사 월급을 주는 식이다. 교감인 내가 회사를 맡았다. 그러나 판로를 찾지 못했고, 결국 파산에 직면했다. 할 수 없이 100만 위안(당시 환율 기준 약 20만 달러)에 달하는 부채를 내가 떠맡는 조건으로 공장을 인수했다. 현금 없이 창업한 셈이다. 88년의 일이다.”

● 뚜렷한 계획 없이 공장을 인수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자동차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바로 유모차다. 같은 ‘차’ 아닌가. 유모차를 직접 개발해 특허를 땄다. 간이 침대로도 사용할 수 있는 유모차였다. 그러나 생산할 시설이 없었다. 돈이 궁했고, 그래서 4만 위안에 특허를 팔았다. 첫 수익이 발생한 것이다. 그 돈으로 공장을 수리하고 유모차 생산라인을 깔았다. 회사의 첫 제품은 ‘특허’였던 셈이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오하이즈의 최고 ‘상품’은 특허다. 나는 수학을 전공했다. 치밀하게 맞추고, 전체적인 조화를 이뤄내는 게 바로 수학이다. 기술 개발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 회사는 지금 4100개의 다양한 유모차 관련 중국 국내외 특허를 갖고 있다.)

● 만든다고 다 팔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89년에도 접는 유모차를 개발해 특허를 땄다. 이번에는 15만 위안에 팔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거부했다. 내 브랜드로 직접 만들기로 했다. 착한 아이란 뜻의 ‘好孩子(하오하이즈)’ 브랜드를 붙였다. 유모차는 생산하기가 무섭게 팔려 나갔다.

중국 최대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는 데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바로 고유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이들에겐 편하고, 어머니에게는 안전한 제품을 만들었다. 새 모델을 만들 때마다 새로운 기술을 적용했다. 흔히 중국을 ‘세계 하청공장’이라고 말한다. 기업에 기술이 없다는 얘기다. 그건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

(하오하이즈는 쿤산과 미국·일본·네덜란드 등에 연구개발(R&D)센터를 두고 있다. 약 300명의 연구원이 현지에 맞는 유모차 모델 개발에 나서고 있다.)

● 미국 시장 점유율 40%라면 대단한 수치인데.

“96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출장을 갔다. 일을 마치고 한 쇼핑센터에서 쉬고 있었는데 한 부인이 유모차를 끌고 지나갔다. 직업병인지 유모차만 보인다.

그런데 마침 아이가 울었다. 부인은 계단으로 유모차를 끌고 가더니 앞 뒤로 몇 번 흔들었다. 아이에게 작은 ‘흔들림(충격)’을 주기 위해서였다. 아이가 조용해졌다. ‘흔들리는 유모차’가 개발된 계기였다.

귀국 후 만든 모델이 바로 ‘바바야오, 마마야오(爸爸摇, 妈妈摇·‘아빠가 흔들고, 엄마가 흔들고’라는 뜻)’였다. 그게 미국 시장에서 히트를 쳤다. 당시 2800개에 달하던 미국 월마트에서 모두 이 제품이 팔렸다. 2000년에만 약 130만 대를 팔았다. 그 후 지금까지 미국시장 점유율 약 40%를 유지하고 있다.”

(이 회사 전시장에 있는 이 유모차는 자동으로 요람이 흔들린다. ‘바바야오’로 표시된 단추를 누르면 심하게 흔들리고, ‘마마야오’ 단추를 누르면 부드럽게 흔들리는 구조다.)

● ‘하오하이즈’가 명품은 아니지 않은가?

“매클래런·실버크로스·퀴니 등 세계적인 유모차 브랜드가 많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시장이 있다. 그들이 우리의 경쟁 상대는 아니다. 오히려 ‘하오하이즈’는 이 같은 브랜드가 고유의 특성을 가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우리 회사가 갖고 있는 특허 4100개를 고급 브랜드에 팔고 있다. 중국인들은 대립보다 조화를 중시한다. 기업 경영도 다르지 않다 .”

● 글로벌 전략은.

“나는 인텔이 좋다. 인텔이 글로벌 전략의 모델이다. 세상에 컴퓨터 브랜드는 많다. 그러나 그들은 인텔 칩을 내장한다. 컴퓨터 업체의 성공이 곧 인텔의 성공인 것이다. 하오하이즈도 마찬가지다. 브랜드 업체에 핵심 기술을 제공하고, 그 브랜드의 성공으로 내가 이익을 보는 구조다. 컴퓨터에 ‘intel’ 마크가 붙어 있듯이 유모차 한 구석에 ‘gb’라는 하오하이즈 심벌이 붙는다면, 그게 바로 국제화다.”

쿤산=한우덕 , 사진=김형수 기자

j 칵테일 >> 가까이서 본 쑹정환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다. 수더분한 외모, 2만 명의 직원을 이끄는 기업 총수라면 있을 법도 한 권위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인터뷰 내내 그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흘렀다. ‘강남의 신사(江南紳士)’라는 별명이 실감난다. 그는 “일하는 게 즐겁다”고 했다. 요즘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작업복을 입고 본사 R&D센터 연구원들과 함께 기술 개발에 나선다.

쑹 회장은 ‘의사의 아들’이었다. 경영철학을 묻는 질문에 그는 “의사가 그러하듯, 기업 경영도 결국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의약 관련 용어로 비유를 했다. 하오하이즈의 경영 방식에 대해서는 “약도 짓지만, 핵심 약초를 다른 약국에 팔기도 한다”고 했다. 그는 또 다른 브랜드의 성공을 위해 "약방의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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