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운드 시대 한국농업의 새 길] 上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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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올여름 이웃의 논 1천5백평을 사들인 경북 의성의 농민 박지운(41)씨는 요즘 한숨뿐이다. 그는 그동안 가을걷이가 끝나자마자 논에다 마늘.양파를 번갈아 심고, 산비탈마다 사과.자두 묘목을 심어왔다.

하지만 양파와 마늘은 툭하면 풍년으로 가격이 폭락했고,과일 묘목은 주렁주렁 열릴 만하면 어느새 시세없는 구식 품종이 돼있었다.

그는 "어느날 돌아보니 그동안 쌀농사만 늘린 사람들은 계속 오른 수매가 덕분에 나보다도 수입이 더 좋았고 그래서 나도 빚을 내 논을 샀던 것"이라며 "그런데 이렇게 쌀값이 떨어지고 쌀시장까지 개방되면 어찌하느냐"고 하소연했다.

◇ 막대한 투자에도 쌀농사 경쟁력 떨어져=우루과이라운드(UR)타결 이후 한국 정부는 2004년까지 개방을 늦춘 쌀농사의 경쟁력을 키우려고 무진 애를 썼다. 20조원의 예산이 경지정리와 수리시설 확충, 농업 기계화에 들어갔다.

정부는 개방이 10년 미뤄지는 동안 쌀의 국내외 가격차를 줄이면 개방되더라도 국내 쌀농업이 생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정부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쌀농사만 짓는 전업농을 육성해 대규모 생산으로 가격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목표인데 국내 쌀농사는 여전히 영세하다.'보다 적은 농민이 보다 많은 땅을 경작하도록 한다'는 정부 정책은 가구당 벼 재배면적이 95년 0.9㏊에서 지난해 1㏊로 늘어나는데 그쳐 공염불이 됐다.

노동력을 줄이기 위한 기계화에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생산비는 계속 높아졌다. 생산비에서 차지하는 비중(67%)이 큰 인건비와 토지 이용료가 올라갔기 때문이다. UR가 타결된 93년 10a당 39만7천원이었던 생산비는 지난해 53만7천원으로 뛰었다.

농림부 관계자는 "막대한 투자로 쌀농사에 들어가는 노동시간은 UR 이후 절반으로 줄었는데 농민들이 쌀농사로만 몰리는 바람에 논값이 오른 데다 농사규모가 커지지 않아 생산비를 줄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 결과 쌀시장이 추가 개방되면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할 중국과 비교하면 경쟁력이 크게 뒤진다. 한국은 중국보다 생산비가 7.5배 높다. 당연히 쌀값도 6~7배나 비싸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은 정부와 국회가 농민의 표를 의식해 추곡 수매가를 계속 올리자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생산이 늘었기 때문이다.

농촌경제연구원 관계자는 "94,95년 추곡 수매가를 동결하자 쌀 생산이 늘지 않았다"면서 "계속 이런 식의 구조조정을 밀고 나가야 옳았다"고 지적했다.

◇ 쌀농사 채산성 있나=지난 13일 서울 여의도에서 시위를 벌인 농민 1만여명은 "쌀값의 생산비를 보장하라"고 외쳤다.현재 쌀값은 생산비의 90%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농림부 통계를 보면 지난해 쌀농사의 순수익률이 48.3%다. 쌀을 팔아 벌어들인 돈에서 비료.농약값 등 비용과 자신의 노동대가까지 포함한 모든 인건비, 토지 이용료를 빼더라도 절반 정도를 순익으로 챙길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와 농민단체의 서로 다른 해석은 생산비를 따지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논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경우의 기회비용까지 감안하며,인건비는 전산업 평균노임을 적용한다.

그러나 농림부는 올해 쌀값이 떨어졌어도 생산비를 웃돈다고 주장했다.심재천 농산과장은 "농민들이 쌀 재배면적을 계속 늘리는 것은 쌀농사가 남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충남 성환에서 6만여평의 쌀농사를 짓는 이종우(47)씨는 "쌀시장이 개방되더라도 쌀농사에 채산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해드림'이란 자체 브랜드를 개발, 인터넷 직거래로 당일 방아를 찧은 쌀을 소비자에게 배달하는 방식으로 지난해 5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李씨는 "농민들이 그동안 질보다 양에 치중해왔고,정부도 질에 신경쓰지 않고 수매해왔다"며 "지역마다 품질을 높이고 자체 브랜드를 육성하면 개방 이후에도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효준.정철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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