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레임덕과 시위 봇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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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각종 집단과 단체들의 요구와 주장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집단은 집단대로, 개인은 개인대로 자신들의 이익만 앞세워 목청을 돋우기 바쁘다. 국익과 공익, 법과 질서를 생각하기보다 폭력이나 도로 점거.방화로 이어지는 집단시위까지 등장하고 있다.

특히 내년 지방선거와 대선을 앞두고 권력누수 현상에다 눈치보기 행정으로 정부의 단속 의지마저 실종된 느낌이 있다.

전국의 관광호텔 업자들이 관광오락업(슬롯머신)과 관광휴양목욕장업(증기탕) 영업을 허가해주지 않을 경우 월드컵 참가 선수단과 국제축구연맹(FIFA) 관계자 등 외국인들의 숙박예약을 받지 않기로 결의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들은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관광사업 등록증을 반납하고 관광호텔 사업을 포기하는 '대정부 투쟁'을 벌이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월드컵 준비에 한창이어야 할 관광호텔 업계에서 개막 2백일도 안 남기고 이같은 발상이 나왔다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다. 호텔 경영난 타개와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한 불황 타개책이 어째서 슬롯머신과 증기탕 영업이어야 하는가.

설령 그 주장이 옳다 하더라도 월드컵 관광객 숙박 거부라는 방법은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 지구촌 전 세계인의 축제라는 월드컵의 의미와 개최국가 국민의 자긍심,직업적 긍지를 생각한다면 이같은 극한투쟁은 국민적 비난과 외면을 면치 못할 것이다.

확산일로에 있는 농민시위도 생각해 볼 문제다. 어제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대규모 농민대회를 비롯해 하루가 멀다하고 전국에서 농민집회가 계속되고 있다. 농정(農政)실패를 비판하고 쌀 등 기초농산물 수입 개방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목소리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정부가 경청하고 대응책 마련을 서둘러야 할 시급한 과제다. 그렇지만 목적이나 명분이 정당성을 잃지 않으려면 절차나 과정에도 잘못이 없어야 한다. 농민집회가 차도 점거로 교통을 방해하고 폭력화하는 일이 있어서는 농민에 대한 여론의 반감을 부를 수도 있다.

또 전교조는 오는 26일 전국 조합원 9만여명의 교사가 하루 이상 연가를 내는 사실상의 총파업을 벌인다는 계획이다. 교원 성과금 차등지급과 7차 교육과정 반대,자립형 사립고 철회,사립학교법 개정 등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미 지난달 27일에도 1만5천여명이 집단연가를 내고 집회를 열어 논란이 됐었다.

각 집단과 단체들의 요구와 주장이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해도 가뜩이나 국정이 혼란스럽고 이완현상까지 보이는 시점에서 집단 과격시위로 문제를 풀어가려 해서는 안된다. 나라 전체가 어디로 떠내려갈지 매우 불안한 상황이다. 변화된 시대환경에 맞게 정책을 고쳐가는 데 서로 머리를 맞대 해결점을 찾아야 하고 또 절차와 과정을 중시하며 요구와 주장을 정부에 전달해야 국민도 동의할 것이다.

정부의 엄정한 법집행 의지가 특별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원칙과 기준에 따른 냉정한 행정으로 국법질서 수호에 나서야 한다. 불법적이고 비상식적인 집단행동은 결코 뜻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정부가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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