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을 바꿔라, PD 열전 ① 엠넷(Mnet) 김용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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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ARS(1600-0199)와 UCC를 통해 오디션 접수를 하는 ‘슈퍼스타K’는 전국을 돌며 현장예선을 치르는 중이다. 8일 치러진 광주 예선에도 8000여 명이 몰렸다. 김용범 PD는 “올해는 20대 남성들의 참가가 눈에 띄게 늘었다. 데뷔 기회를 잃은 사람들의 마지막 도전 창구인 것 같다”고 했다. [프리랜서 오종찬]

‘TV 프로그램이란 게 다 그래~’라고? 여기 ‘다 그래’를 뒤집는 PD들이 있다. 붕어빵 기획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색깔로 방송가의 ‘판’을 바꿔가는 젊은 피들이다. 예능·드라마·교양·라디오 프로의 역사를 다시 쓰는 아이디어맨들을 만나본다. 그들이 있어 방송은 진화한다.

그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숫자들. ① 100만 : 올 케이블채널 엠넷(Mnet)의 오디션프로그램 ‘슈퍼스타K 2’에 현재까지 예선 참가자 수(전화 참여 포함). 지난해 72만 명을 넘어선지 오래다. ② 2만 : 지난해 예선현장을 촬영한 60분짜리 테이프 개수. 며칠 밤을 새며 빠짐없이 다 봤다. ③ 8.47 : ‘슈퍼스타K’ 시즌1의 시청률 최고기록(%). 케이블TV 20년사의 최고 기록이기도 하다.

숫자들, 굉장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슈퍼스타K’의 산파 김용범 PD(35)를 설명할 순 없다. 예컨대 테이프 2만여 개를 일일이 보는 이유. “예선 부스마다 심사위원이 다르니까 형평성을 맞춰야 하잖아요. 노래 실력은 좀 쳐져도 남다른 사연이 있을 수 있고.”

말하자면 큰 그물코에서 빠져나가는 사금을 다시 줍는 일. 그리고 그 금싸라기를 모아 보배로 꿰어내는 게 그의 일이다. 시골 촌부부터 여드름 가득한 재수생까지 수만 명의 ‘1분40초’(지역예선 개인당 참가시간)를 밤새도록 돌려보는 것. ‘사람’에 대한 관심이 아니고선 엄두 못 낼 일이다.

“회사에서 ‘축하한다’며 올해도 ‘슈퍼스타K’를 맡기는데, 처음엔 아득하더라고요. 그 짓을 또 해야 하나. 하지만 현장에 나오니 기운을 차리게 되네요. 꿈과 희망에 부푼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저들을 위해서라도 올해도 성공해야 할 텐데 싶고.”

올 ‘슈퍼스타K’는 우승상금이 2억원으로 늘었고, 제작비도 지난해(40억원)의 두 배로 예상된다. 지역예선이 열리는 체육관마다 목청 하나 믿고 찾아온 수천 명이 장사진이다. 지난해 서인국·길학미를 보며 “나도 한번 해봐”를 꿈꿨을 이들이다. 6월부턴 해외 오디션도 진행된다. 숱한 지상파·케이블 프로그램이 한국의 ‘아메리칸 아이돌’을 표방했다가 소리소문 없이 막 내린 것과 대조적이다.

첫 손에 꼽히는 성공 요인은 출연자의 사연을 감동적으로 전달한 스토리텔링. 수감 중인 아버지에게 바치는 노래,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우러진 화음 등이 시청자의 마음을 적셨다. 때문에 “노래 실력보다 인간극장·인기투표다” 하는 비판도 있었다. 김 PD의 생각은 달랐다.

“한국에서 프로 가수가 아닌 일반인이 주목을 받으려면 내 가족·이웃인 양 친숙하게 느껴져야 해요. 미국 리얼리티쇼는 경쟁 구도를 강조하고 무대에서도 개성이 넘치지만 한국인은 튀는 걸 꺼리고 체면을 중시하잖아요. 스스로 말하지 않는 걸 미리 끌어낼 필요가 있죠.”

게다가 노래하는 이들은 어찌나 사연이 구구절절한지. 디자이너·모델처럼 화려한 분야에선 볼 수 없는 인간미다. 지원서에 “인생에서 세 번의 고비, 세 번의 행복했던 순간을 쓰라”고 한 건 이 때문이다. 사람이 부각될수록 노래와 프로그램이 진솔해진다. 우승이 대수랴. 가슴에 응어리진 회한과 꿈을 카메라 앞에서 풀어버리는 것만으로도 각자에게 큰 선물인 것을.

‘사람 이야기’는 김 PD의 강점이다. 대표작이 2008년 ‘서인영의 카이스트’. “아티스트와 시청자가 공유할 수 있는 뭔가를 해보자”고 시작한 프로가 ‘신상녀’ 서인영의 인간미를 재발견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스타의 학력 콤플렉스가 시청자에게 동질감을 자아낸 것이다. “PD 중엔 섭외 잘하는 사람, 편집 잘하는 사람 등 능력이 각각이잖아요. 저는 현장에서 사람들 얘기를 잘 만들어내는 편 같아요. 혈액형이 A형이라선지 평소 말하기보다 듣고, 상상하는 걸 즐기고요.”

한국외국어대 영어과 94학번으로 2002년 Mnet에 입사했다. 입사 9년차. 영화 ‘워낭소리’를 보며 펑펑 울다가도, “내가 우는 이유가 아버지 때문인가 동물 때문인가 분석하는 걸 보면 PD가 천직인 것 같다”고. 언젠가 도전하고픈 장르는 TV 뮤지컬 프로. “드라마 도중에 노래를 해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없게, 한번 성공해보고 싶어요. 남들이 안 하는 걸 하는 이유요? 글쎄, 사람들이 왜 그걸 안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강혜란 기자

▶내 인생의 B컷=2006년 ‘SS501의 스토커’라는 프로그램. 당시로선 처음 시도한 페이크 리얼리티였다. SS501의 안티팬들의 협박 시도 등을 핸드헬드로 재연했는데, ‘사실인가 허구인가’ 하는 노이즈마케팅으로 당시로선 파격적인 시청률 2%대를 기록했다. 반쯤 장난 삼아 한 프로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니 새삼 책임감을 느끼게 됐다.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공감을 줄 수 있는 게 뭔지 고민하게 됐다. PD로서 순방향으로 영향을 끼쳐야겠다는 생각이 ‘슈퍼스타K’로 이어졌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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