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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10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107. 언론에 알려진 첫 법문

성철 스님이 종정으로 추대되자 세속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절간에서야 이미 유명한 큰스님이지만 세속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던 터라 기자들이 한꺼번에 인터뷰를 요청해왔다. 종정이 됐다 하나 취임식을 위한 서울 나들이조차 않은 성철 스님인데, 인터뷰에 응할 리가 없다.

그렇다고 가만있을 기자들도 아니다. 큰스님 육성을 듣고 싶다는 한 기자가 지극정성으로 요청하는 바람에 원영 스님(경기 하남시 정심사 주지)과 의논했다."큰스님 법문을 책으로 만들기 위해 녹음을 풀어 정리해둔 원고 중 일부를 주자"는 데 뜻이 모아졌다.

법문 녹음 중 한시간 분량을 풀어놓은 원고를 기자에게 주었더니 얼마 뒤 한 주간지에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실렸다.'성철 종정 최초의 법문 공개'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가면서 절집 사이에 일대 회오리를 일으켰다. 전국 주지스님들로부터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종정이 됐으면 종정답게, 다른 스님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법문을 해주셔야지. 어떻게 중들이 갖고 있는 밥통을 다 깨는 법문을 하실 수 있는 것인가. 안그래도 사회적으로 승려의 위상이 실추되어 있는 판국에, 북돋워주시지는 못할망정 어찌 일반 국민들을 상대로 대놓고 중 욕을 할 수 있는가."

급기야는 "종정을 잘못 모신 것 같다"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일부 중진 스님들 사이에선 "당신만 최고면 다냐?"는 식의 막말도 없지 않았다. 성철 스님보다 더 죽어나는 것은 상좌인 필자였다. 길거리에서 갑자기 삿대질을 당하기도 했다.

"상좌들이 큰스님을 잘 보필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 다른 좋은 법문도 많은데 하필이면 그런 법문을 내주어서 중들 망신을 시키는 거냐. 큰스님 똑바로 모셔라."

당시 일대풍파를 일으켰던 법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절집의 잘못을 꾸짖는 내용이라 재론하기 거북한 면도 있지만 성철 스님이 남긴 경책(警策.꾸짖음)이라 소개한다.

"어떤 도적놈이 나의 가사장삼을 빌어입고 부처님을 팔아 자꾸 여러 가지 죄만 짓는가? 누구든지 머리 깎고 가사와 장삼을 빌어입고 승려의 탈을 쓰고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을 부처님께서는 모두 도적놈이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승려가 되어 가사와 장삼을 입고 도를 닦아 도를 깨우쳐 중생을 제도하지는 않고, 부처님을 팔아 자기의 생계수단으로 삼는 사람은 부처님 제자도 아니요, 승려도 아니요, 다 도적놈이라는 겁니다."

능엄경을 인용한 법문이다. 철저한 수행과 정진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러나 당시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한 경우, 그야말로 호구지책으로 머리를 깎은 승려들이 적지않던 상황인데 성철 스님이 단도직입적으로 이를 지적한 셈이다. 이어지는 법문.

"우리가 승려가 되어 절에서 살면서 부처님 말씀 그대로를 실행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부처님 가까이는 가봐야 할 겁니다. 설사 그렇게는 못한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의 정반대 방향으로는 안가야 할 것입니다.

나는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다(人身難得 佛法難逢)'인데, 다행히 사람 몸 받고 승려되었으니 여기서 불법을 성취하여 중생제도는 못할지언정 도적놈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 사는 그 사람을 도적이라 한다면 그런 사람이 사는 처소는 무엇이라고 해야겠습니까? 그곳은 절이 아니고 도적의 소굴, 적굴(賊窟)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도적에게 팔려 있으니 도적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지요.…우리 자신이 도적놈 되는 것은 나의 업이라 어쩌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지옥으로 간다 할지라도 달게 받겠지만 부처님까지 도적놈 앞잡이로 만들어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화법이 직설적이라 내용이 간단명료하면서 강렬하다. 이리저리 욕을 먹다가 생각해봤다.

그 많은 법문 중 하필 그런 법문을 내주어 절집안을 불편하게 했을까. 성철 스님의 제자인 우리는 그런 꾸짖음을 워낙 자주 들었기에 그 정도 내용은 '늘상 있을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무심코 그 법문을 기자에게 건네준 것이다.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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