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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25시] 테러전쟁 틈탄 우익 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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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구키가 가왓타(空氣が變った)"라는 일본어 표현이 있다. 갑자기 분위기가 변했다는 뜻이다. 단순히 분위기만이 아니라 세상의 흐름이 달라졌을 때 쓰는 말이다. 이 표현에는 세상의 물줄기가 변하면 그에 맞춰 잘 몰려가는 일본인의 성향이 함축돼 있다.

자위대의 해외파병을 본격적으로 인정한 테러대책특별조치법이 지난달 29일 탄생한 데는 '바뀐 공기'가 결정적 힘이 됐다.

'바뀐 공기'란 지난 4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등장 이후 불고 있는 '일본은 달라져야 한다'는 변화의 바람이다. 정치평론가 구보 후미오(久保文男)는 그 바람을 "해외에서 일본의 힘을 중시하는 마음"이라고 설명한다.

그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과거 일제에 의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피해를 본 한국.중국 등 주변국은 그 바람이 '집단우익'과 '극우'의 바람이 될까 걱정하고 있다. 우려했던 바람은 생각보다 빠르고 강하게 불고 있다.

미국 테러사건 이후 불과 48일 만에 이 법이 제정되자 일본의 보수.우익세력조차 "격세지감을 느낀다"며 놀라고 있다. 지난 수십년간 자위대의 군사력 강화를 주장해왔지만 야당과 많은 국민의 반대로 실패해온 그들이다. 그런데 바뀐 공기는 불과 한달반 만에 '일본 방위에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한 것이다.

일본 정부.여당은 1991년 2월 걸프전이 터졌을 때 PKO 협력법안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그러나 야당의 반대로 입법에 실패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뀐 공기'를 틈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해치웠다. 또 짚어볼 것은 변화를 절묘하게 이용한 고이즈미의 전략이다.

고이즈미가 미국 테러사건 이후 줄곧 주장한 것은 국제사회에 대한 공헌이었다. 그러면서 걸프전 당시 군대를 파견하지 못해 국제사회에서 무시당했다는 말로 국민감정을 자극했다. 그 결과 야당의 거센 반대에도 고이즈미는 '국회 승인 없이 먼저 자위대를 해외에 보낼 수 있는' 법을 통과시켰다.

자신감을 얻은 보수.우익세력은 다음 목표인 평화헌법 개정 논의에도 풀무질을 시작했다.국회 헌법조사회의 움직임도 본격화하고 있다.

'바뀐 공기' 때문에 일본이 '브레이크가 안듣는 자동차'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일본에서도 조금씩 우려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다.

오대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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