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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현장] 홍상수 감독 새작품 '생활의 발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강원도의 힘''오!수정'.

섬세하지만 냉철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잊어버리고 싶은 인간의 께름칙한 잔재들을 자꾸 들춰낸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발견의 쾌감'과 '발각의 씁쓸함'이 교차한다.

그의 네번째 영화 '생활의 발견'(미라신 코리아 제작)은 지금 경주시 황오동의 한 골목길에서 막바지 촬영이 한창이다.

먼저 "인간 내면의 발견에 관해서는 일가를 이뤘다고 생각하는데 또 '생활의 발견'인가"라고 물었다.

그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다. "중국 소설가 린위탕(林語堂)의 작품 제목이다. 근데 제목을 지을 때는 그걸 떠올린 것은 아니다. 어느날 그냥 그 제목이 좋겠다는 느낌이 왔다. '생활'과 '발견'이란 단어가 나란히 있으니 재미있지 않나. 다소 부담도 느끼지만 나는 내 우연성을 믿는다."

아침에 일어나 햇빛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듯, 배고플 때 떡볶이 한 입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느끼듯 이 영화가 그런 깨달음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평소 스태프들에게 여러차례 말했다고 한다.

'생활의 발견'은 연극배우 경수(김상경)가 일이 풀리지 않자 여행길에 오르면서 시작된다. 그는 춘천으로 가 시를 쓰고 싶어 하는 무용가 명숙(예지원)을, 경주에서는 유부녀 선영(추상미)을 만나 감상에 빠진다. 이 영화는 일주일 간 있었던 사건들을 따라간다.

29일 흐린 날씨 탓에 촬영이 취소된 터라 30일 오전은 더 바빴다. 더구나 이 영화는 시나리오가 없지 않은가. 아침에야 감독이 대사를 만들어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나눠줘 분주함을 더했다.

이런 방식은 장 뤼크 고다르나 홍콩의 왕자웨이(王家衛)가 구사했던 방법인데 그 바탕엔 실제 느낌을 그대로 살려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감독의 천재성과도 무관치 않다. 촬영도 시간 순서로 진행되고 있다.

홍감독은 "배우나 나나 당시 상황에서 받은 느낌을 그대로 가져가기 위해 아침에 대사를 만들어 여행을 하듯 찍고 있다. 전날 시나리오를 쓸 수도 있지만 더 생생한 느낌을 갖기 위해 아침에 쓰고 있으며 머리도 맑아 좋다"고 말했다.

실제 전날 밤 기자가 홍감독에게 "배우는 누가 나은 것 같으냐"고 묻자 그는 "당신은 엄마가 좋으냐, 아빠가 좋으냐?"라는 물음으로 우회적으로 대답했었는데 이날 대사에 "엄마가 좋으냐, 아빠가 좋으냐"란 구절이 들어 있었다. 그만큼 대사는 큰틀 안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대사의 생생함이 대단하다.

주연 김상경 역시 "정말 여행하는 기분이고 연기가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내가 전에 안하던 연기를 하는 걸 발견할 적엔 놀랍기도 하다"고 한다.

전작들에서 부분적으로 이런 방식을 취해왔지만 시나리오가 아예 없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에 뭔가 변화의 조짐이 읽히기도 한다.

전작들이 잘 짜여진 구조 속에 이야기가 들어앉아 계산적으로 인간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면 이번에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뭔가를 발견하게 할 셈이다. 그래서인지 그도 "어떤 관객이 내 의도를 어떻게 발견해 낼지 궁굼하다"고 했다.

지금까지의 촬영이 비교적 만족스럽다는 그에게 "자신의 스타일이 강한데 관객, 혹은 흥행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그는 "관객이 중요하고 흥행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관객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스타일을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관객과 계속 새롭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생활의 발견'은 내년 초 개봉 예정이다. 그는 부정하지만 주변에선 칸 영화제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번 영화는 전작들에 비해 훨씬 유연하고 따뜻한 영화가 될 것이란 게 현장을 지키는 스태프들의 한결같은 느낌이다. 이틀 동안 현장에 있었던 기자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주=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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