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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신용평가사를 개혁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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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미국의 신용평가사인 무디스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의 투자등급을 받아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현대그룹의 재무 지급보증을 받지 않고, 그 대신 사업의 현금 흐름과 자기자본 증액 약관을 채권에 담보화하는 방법을 미국 2대 신용평가사에 설명했다. 주거래은행이 관리하는 재무 지급보증은 한 푼도 쓰지 않았지만, 이 대체담보가 기능적으로는 현대그룹의 지급보증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고 미국 2대 신용평가사가 마침내 동의했다. 평가작업 결과 BBB투자등급을 받으니 채권 발행 하루 만에 전 세계의 기관투자가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이 몰려 들어왔다.

전 세계 기관투자가들을 순식간에 동원할 수 있는 신용평가사의 막강한 영향력은 경이적이었다. 그러나 평가수수료를 평가 혜택을 받았던 투자가들이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금의 실수요자인 채권발행회사, 즉 현대전자가 지불하는 것이 참으로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2년 후 IMF 금융위기를 경험하면서 국제신용평가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 국민 모두가 처음으로 알게 됐다. 신용평가사의 젊은 미국인들과 한국 고위관리의 면담 모습이 TV 뉴스에 자주 등장했다. 그때만 해도 국제신용평가사의 위세당당한 권위에 모두가 신뢰했다.

2~3주 전 G20 정상회의 준비위원장 초청 강연이 서울파이낸셜 포럼에서 있었다. 필자는 국제신용평가사 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일어났던 3년 전, 그리고 제1차 워싱턴 G20 정상회의에서 잠시 거론됐을 뿐 아직도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채권 발행사가 평가수수료를 지불하는 것은 이해상충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도 아직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신용평가사 개혁안을 11월 서울에서 개최되는 G20 정상회의 의제에 포함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이번 주 들어 그리스·포르투갈·스페인의 신용등급 때문에 국제신용평가사에 대한 비난이 빗발치고 있다. 이해상충이다, 뒷북 친다, 사후 확인사살만 한다, 외모에 치중하는 편견이 있다, 수수료 수입을 위해 최고 등급을 남발한다 등등. 2주 전에는 미 상원의 조사소위 칼레빈 위원장이 신용평가사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 조사한 500쪽 분량의 상세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미국은 미국의 리더십과 국익을 위해, 그리고 국제자본시장의 질서를 위해 신용평가사를 서둘러 개혁해야 한다.

첫째, 지금까지와는 정반대로 채권투자자로부터 평가수수료를 받게 하면 ‘무임승차’라는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채권발행사가 평가수수료를 지급하도록 하되 신용평가사가 직접 받지 않고,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운용하는 기금에 지급하게 해 증권거래위원회가 이 기금을 운용하고, 정해진 공식에 따라 매달 신용평가사에 지급하게 하면 한다. 신용평가사는 이 새로운 제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인사고과체제 및 보수체제를 개혁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평가사가 채권발행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객관적인 평가를 하게 될 것이다.

둘째, 신용평가사들은 아시아 및 기타 신흥국 출신 분석전문가를 과감하게 늘려야 한다. “뉴욕에 자리 잡은 신용평가사 직원이 각국의 중앙은행보다 경제상황을 더 잘 안다고 할 수 없다”고 에발트 노보트니 오스트리아 중앙은행 총재가 말했다. 신용평가사들은 신흥국 출신의 학생들도 과감히 채용해야 구미 편향의 평가를 지양하게 될 것이다. 이런 개혁이 없으면 아시아와 기타 지역에서 국제적인 신용평가사가 생겨 신평사끼리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것이다.

셋째, 채권투자 전문회사의 분석이나 신용부도스와프(CDS)가 신용평가사 평가의 대체재가 될 수 있으니 이 기능과 시장을 활성화해야 한다. 앞으로는 국제 투자자금이 신흥국에서 뉴욕을 반드시 거치지 않고 신흥국으로 중개돼 수익률이 더 높은 신흥국 투자처로 옮겨가는 비중이 늘어날 것이다. 신용평가사들의 투명성과 직원의 국제화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이들의 시장점유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수룡 도이치은행그룹 한국회장 겸 한국대표 미공군협회 미그앨리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