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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 뉴스 <100> 민사 사건까지 확대되는 전자소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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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민사 소송에 휘말려본 사람이라면 재판 일정에 답답함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재판 기록을 보기 위해 법원을 찾으면 복잡한 절차 때문에 하루를 다 보내야 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재판 중간에 낸 답변서 같은 서류가 우편을 통해 소송 상대방에게 가려면 또 며칠이 지나야 하지요. 이런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소송 문서를 주고받을 수 있는 전자소송이 시행됐습니다. 내년부터는 우리 삶에 바로 영향을 미치는 민사 사건에도 이 제도가 도입된다고 합니다. 전자소송이 무엇인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살펴봤습니다.

글=최선욱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1 13년차 직장인 ‘어굴한’씨는 내 집 마련을 눈앞에 두고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주인이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 것이다. 어씨는 소송을 통해 전세금을 돌려받기로 했다. 하지만 소송을 제기하고 두 달이 다 돼 가는데도 재판이 열리지 않고 있다. 집주인 주소가 정확하지 않아 그가 받아야 할 어씨의 소장이 여러 번 반송됐기 때문이다. 잔금을 치러야 할 시간은 다가오는데 어씨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법원에 물어보면 “기다려 보라”는 말만 돌아온다.

#2 회사에서 부당한 징계를 받고 직장을 옮긴 ‘오화나’씨. 전 직장을 상대로 소송을 낸 그는 재판 기록을 보고 싶어 잠시 회사를 빠져나와 법원을 찾았다. 하지만 민원실은 만원이었다. 대기표를 받고 한참 순서를 기다렸다. 어떤 신청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든 게 낯설었다. 겨우 절차를 마쳤지만 법원 직원은 “좀 더 기다려 달라”고 한다. 담당 재판부가 오씨의 기록을 검토 중이어서 민원실에 기록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빨리 회사에 들어가야 하는데…. 오씨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답답함이 교차한다.

#3 ‘나공정’ 판사는 소송 기록을 읽다가 전화를 받았다. 해당 사건의 당사자가 기록 열람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1시간만 더 기록을 보면 사건 파악을 마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마음 같아선 민원인을 되돌려 보내고 싶었지만 ‘그래도 사건 당사자가 우선’이라는 생각에 기록을 덮고 접수실로 자료를 보냈다. 한창 속도를 내다가 맥이 끊겼다. 다시 사건 기록을 보려 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4 ‘명석한’씨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법원 실무관 채용 시험에 합격했다. 대학 시절 법을 전공했던 그는 재판 지원 업무를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주 업무는 사건 문서 정리다. 두꺼운 종이 뭉치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묶고, 소송 문서를 전달하기 위해 우체국을 들락거린다. 하루에도 소송 기록을 들고 판사실과 자신의 책상을 오가는 일이 몇 번씩 계속된다. 다른 법원에 있는 동료는 "그나마 네가 있는 법원은 엘리베이터라도 있으니 낫다”고 한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단순 작업을 하려고 시험공부에 매달렸나”는 실망감이 밀려온다.

법원에서 수십 년째 반복되고 있는 일상의 모습이다. 종이 기록을 주고받는 데 너무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법원은 지난달 26일부터 종이 서류가 필요 없는 전자소송 시행에 들어갔다. 재판 당사자가 소장과 증거기록 등 소송 관련 서류를 인터넷으로 제출하고, 법원이 판결문이나 결정문을 전자문서로 보내는 인터넷 재판이 시작된 것이다. 올 3월 ‘민사소송 등에서의 전자문서 이용 등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면서 전자문서가 법적 효력을 갖게 됐다. 일단 특허법원 사건부터 시작해 내년 5월에는 민사 사건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2012년 1월까지는 행정·가사·도산 사건에서도 전자소송이 시행된다. 대법원은 2013년 집행·비송 사건에도 전자소송을 도입할 계획이다.

소장 제출에서 판결문 송달까지 인터넷으로

대법원 전산정보센터의 관제센터. 이곳에서 보안 및 네트워크 담당 직원들이 전국 법원의 통신망을 관리한다. 전자소송에 쓰일 문서를 저장할 700TB급 서버 컴퓨터가 가동되고 있다. [조용철 기자]

대법원 전자소송포털 홈페이지(ecfs.scourt.go.kr)에 접속해 사용자 등록을 마치면 누구나 전자소송을 이용할 수 있다. 사용자 등록에는 공인인증서가 필요하다. 이후 접속화면에서 소장이나 소송서류를 제출할 수 있다. 소송 서류의 첨부자료로 PDF(문서)·AVI(동영상)·MP3(음성) 파일도 등록할 수 있다. 인지대나 송달료는 신용카드·계좌이체로 납부할 수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소장 작성이 간편해졌다는 것이다. 빈칸 채우기 방식으로 예시가 많아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아도 ‘나홀로 소송’을 진행하기 쉬워졌다. 소송 문서를 작성하다 중간에 저장하고 나중에 마무리할 수도 있다. 소송을 제기하면 소송 상대방은 우편으로 소장을 받아보게 된다. 단 피고도 전자소송포털에 가입돼 있다면 우편송달 과정 없이 휴대전화 문자메시지와 e메일로 소장을 받을 수 있다. 이럴 경우 송달료가 필요 없어 소송 비용이 절약된다. 대법원은 소송이 잦은 기업ㆍ금융기관ㆍ관공서 등에 전자소송포털 가입을 적극 권장하기로 했다. 이렇게 소송 관련 서류 우편업무를 대폭 줄인다는 계획이다.

소송 당사자는 상대방이 제출한 답변서·준비서면·증거서류를 인터넷으로 열람·출력할 수 있다. 소송 기록을 보기 위해 일과 시간에 법원을 방문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다. 재판이 끝난 후엔 판결문, 명령·결정서, 통지서 등 각종 문서도 인터넷으로 받아볼 수 있다. 소송 당사자나 여러 사건을 진행하는 변호사는 전자소송포털의 ‘나의 전자소송’ 메뉴를 이용해 자신과 관련된 모든 사건을 실시간으로 통합 관리할 수 있다.

대법원 이정석 전산정보관리국장은 “무엇보다 국민에게 신속한 재판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실무관 등 법원 인력을 좀 더 효율적인 업무에 활용할 수 있어 법원 행정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대법원은 전자소송 준비를 위해 2008년 경기도 성남에 전산정보센터를 개원했다. 이곳에는 700테라바이트(TB) 용량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서버 컴퓨터와 네트워크 장비가 설치돼 있다. A4용지로 약 2380억 장 분량의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규모다. 현재 이곳에 저장돼 있는 등기·가족관계등록부·판결문·경매 데이터 등의 용량이 20TB인데, 그 35배에 달하는 데이터를 담을 수 있다는 게 대법원의 설명이다. 앞으로 전국 법원에서 사용하는 모든 문서와 각종 소송 관련 자료들을 이곳에 저장할 예정이다. 80명의 법원 직원과 민간 기업체 소속 보안·네트워크 전문가들이 24시간 이 시스템을 관리하고 있다.

미국 콜로라도에선 전체 사건의 97%가 전자소송

선진국에선 이미 1990년대 후반부터 전자소송을 도입했다. 미국의 경우 1996년 뉴욕 파산법원을 시작으로 전자소송이 도입됐다. 현재 콜로라도 주에선 전체 사건의 97%가 전자소송으로 진행된다. 2005년 전자소송을 시작한 워싱턴DC도 85%의 이용률을 보이고 있다. 다만 뉴욕은 전체 62개 카운티 가운데 17곳만 전자소송을 시행하고 있어 그 비율이 10%에 그치고 있다.

싱가포르는 1997년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전자소송을 도입했다. 이후 2003년 민사·가사 사건으로 그 범위를 넓혔다. 지금은 전체 사건의 86%를 전자소송으로 진행한다. 영국도 인터넷을 통해 일부 민사 사건에서 온라인 소송(Money Claim Online)을 도입해 운영 중이다. 우리나라는 2001년 대법원이 ‘전자법원 구현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수립한 이후 9년 만에 전자소송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전자 법정도 활성화될 듯

전자소송이 시작되면서 현재 운영 중인 전자법정 제도도 활성화될 것으로 보인다. 전자법정에선 스크린과 빔 프로젝터를 통해 동영상·프레젠테이션·도면·도표를 재판에 활용한다. 중요한 재판은 실시간으로 녹화해 파일로 저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동안 녹화물을 관리하기 위한 별도의 규정·제도가 없어 활성화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전자법정에서 기록으로 저장되는 수많은 자료가 외부에 노출될 위험도 있었다. 앞으로는 재판부가 전자법정에서 녹음·녹화된 자료를 전자소송포털에 등록해 언제든 다시 열람할 수 있게 된다. 해당 자료는 대법원의 전자소송기록관리체계 내에서 통합 관리된다. 재판부가 이전에 비해 자유롭게 법정 녹화ㆍ녹음을 할 수 있게 된다.

지난달 30일까지 특허법원엔 5건의 전자소송이 접수됐다. 첫 사건은 대형 로펌이 대리하는 특허권리범위 확인소송으로 전자소송 시행 첫날 오전 8시45분에 접수됐다. 전자소송 도입에 따라 법원 업무 시작(오전 9시) 이전에도 사건 접수가 가능하다. 특허법원 이상균 공보판사는 “소송 당사자가 전자소송을 신청하지 않더라도 재판부는 컴퓨터 파일로 변환된 전자문서를 기반으로 재판을 진행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종이 사용 줄어들지 주목

대법원은 전자소송 시행으로 종이기록을 만들고 보관하는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변호사 사무실 공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데도 기여해 결과적으로 저탄소 녹색성장이라는 국가적 과제에도 부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 기우종 정보화심의관은 "젊은 판사들의 경우 온라인 문서를 읽는 데 어려움이 없다”며 "종이문서 사용량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역효과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금은 소송 기록 하나를 재판장과 주심 판사, 실무관 등이 함께 돌아가며 보고 있다. 온라인 문서가 익숙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기록이 전산화되면 오히려 종이로 프린트하는 건수가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단순히 종이문서를 스캔한 형태로 소송 문건이 전산화된다면 젊은 판사라도 기록 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면서 "상당 기간은 종이 사용량이 줄어들기 힘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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