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현대판 공신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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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언젠가도 이 난에서 내비쳤듯이 나는 정치적 이슈로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잘 알지 못하기도 하거니와, 그런 주제가 중심이 되는 대화가 끝나고 나면 왠지 소모적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어찌 내 편한대로만 되겠는가.

국내 뉴스의 포커스가 온통 그쪽에 맞춰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주제를 그쪽으로 잡고 싶어하는-물론 여기에는 내가 언론에 몸담고 있다는, 따라서 뭔가 더 알 것이란 기대가 깔려있겠지만-상황에서, 정치적 주제는 일상 대화의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 현실인데.

*** "정권창출 도우면 돈 주자"

얼마 전 오랜만에 대학 친구를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학생시절부터 민주화운동에 깊숙이 몸담았었고 요즘도 시민운동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친구라서 주제는 자연스럽게 요즘 시국 쪽으로 흘러갔다.

그리고는 요즘 '어디서나' 들을 수 있듯, 정치적-특히 정권적-신뢰의 총체적 붕괴란 쪽으로 상황평가가 이어졌다. 여기까지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였는데 이 친구가 갑자기 진반농반(眞半弄半)식의 제안을 하나 했다.

"앞으로는 누가 정권을 잡든 결정적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돈을 줘버리는 거야. 대신 판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고."

그 후 며칠 해외출장을 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대테러 전쟁과 한국판으로 개정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관련 뉴스를 거친 뒤,이용호 게이트와 관련된 여권실세의 실명(實名)거론을 둘러싼 정치권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아, 한국에 왔구나'. 그 때 퍼뜩,앞서 말한 친구의 얘기가 떠올랐다.

정권창출 과정의 공신에게 금전적 혜택을 준다는 발상은 시대역행적인 것이지만, 잘만 활용한다면 쓸모가 없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어차피 정치적 스캔들이란 것이 어떤 형태로든 이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것이라면 차라리 일정한 혜택을 제도적으로 보장함으로써 개입해야 할 동기를 없애-또는 줄여-보자는 얘기다.

문제는 너도나도 공을 자랑하고 나설 터이고, 그 경우 들어갈 돈이 만만치 않을 것이란 점인데 이 또한 과거 예를 살펴보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성싶다.

이 나라의 공신제도는 문헌상,고려 태조 왕건이 홍유(洪儒)등 2천여명을 1~3등으로 나눠 책봉한 것이 첫 예다. 고려야 수십년 전란 끝에 통일을 이뤘던 데다, 그 많은 부인의 수가 말해주듯 호족연합체적 성격이 강했던 터라 현대에 전례로 삼기에는 문제가 있다.

하면 조선조 28번의 공신책봉 중 비근한 예를 찾는 게 순리다. 해서 상고해 보니 정권교체라 할 만한 것이 태조 이성계의 개국공신과,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이 등극한 정국(靖國)공신,광해군을 밀어내고 인조가 왕위에 오른 정사(靖社)공신 등 세번의 예가 있었다.

그 공신의 수가 개국공신의 경우 1등 17명,2등 13명,3등 22명 등 그다지 많은 수가 아니다. 정국.정사공신도 1등만 따지면 각각 8명,10명에 불과하다.요즘 인구를 조선조의 5~6배 정도로 잡아도 그다지 많은 수가 아니다.

하니 두(頭)당 1백억원쯤 준다 해도 1백조원이 넘는 예산에 비기면-그것도 집권 첫 해에만-그리 많이 들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돈이 아깝다는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뒷거래에서 생기는 쓸데없는 손실과, 스캔들이 터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무형적 비용을 감안해보자. '경제적'이란 말은 바로 이럴 때 써먹는 용어다.

*** 권력까지 가지려하면 안돼

물론 공신제도의 폐해가 많았었다.간혹 훈작 삭탈조치도 없잖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금전적 혜택과 권력을 동시에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무작스러운 사법적 조치를 포함해-권력에서 떼어놓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공신제의 현대적 변용(變容)'이 가능만 하다면 솔깃한 제안 아니겠는가 말이다.

이건 웃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볼 만큼 봤고 참을 만큼 참은 뒤, 현실적 고민에서 해본 얘기다 그러니 앙망경청(仰望傾聽).

박태욱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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