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양명학의 고전 '전습록' 완역본 출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조선시대 최대의 이단으로 배척받았던 양명학(陽明學)의 고전 『전습록(傳習錄)』(왕양명 지음, 정인재.한정길 옮김, 청계출판사, 전2권, 각권 2만5천원)이 국내 전문연구자에 의해 완역돼 나왔다.

1백여년 전만 해도 주자학을 비판했다 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던 책이라는 점도 흥미롭지만, 이번 『전습록』 완역본은 충실한 각주에다 특히 번역자의 의견을 담은 해설을 항목마다 곁들여 이른바 '연구 번역서'의 한 전범을 보여준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동양철학 서적을 전문으로 펴내는 청계출판사의 허탁 대표는 "해설을 넣는 문제를 놓고 논란이 있었으나 해설이 없으면 출판을 않겠다고 해 관철시켰다"고 말했다. "해설이 없는 번역은 의미가 반감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실 원문번역과 각주를 다는 형식은 많이 있지만 해설 형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는 일은 국내 학자들이 꺼려왔다.

그러나 원문번역과 각주, 그리고 해설을 담는 형식은 일본이 지난 20세기에 수많은 고전 번역에 활용해 학문적 성과를 고양했다고 허대표는 말한다.

『전습록』은 양명학의 창시자 왕양명(王陽明.1472~1528)의 사상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주자학의 『근사록(近思錄)』과 더불어 흔히 '새로운 유학(新儒學)'으로 불리는 동아시아 근세 유학의 핵심이 담긴 저작이다.

번역에 참여한 정인재(서강대 철학과)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부터 주자학만이 존숭되고, 양명학은 이단으로 금기시돼 오늘에서야 비로소 완역된 모습을 갖게 됐다"고 번역의 의의를 부여했다.

2년간 번역에 매달려 온 한정길(연세대 철학강사)박사는 "『전습록』은 중국보다 오히려 일본에서 더 널리 유포돼 메이지시대 근대화과정에 양명학자들이 많은 공헌을 했다"면서 "주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를 비판한 실천적 학문인 양명학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번역에 가장 많이 참고한 자료는 저명한 중국계 미국 동양철학자 천룽제(陳榮捷)의 『전습록상주집평(傳習錄詳註集評)』이다. 천룽제는 이미 1963년에 『전습록』을 영어로 번역한 바 있다. 이번 완역본은 주로 중국과 일본의 연구성과를 모은 『전습록상주집평』을 소개하면서 그 책에 없는 우리 나라 양명학의 흐름도 함께 담았다.

예컨대 조선시대 양명학의 본산인 강화학파 정제두의 이론이라든가 20세기 초 그 흐름을 계승한 박은식.정인보 선생의 연구성과를 반영한 것이다.

양명학은 선비 중심의 학문이었던 주자학과 달리 사농공상(士農工商)누구나 신분의 귀천 없이 도덕적 이상형인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한 점에서 동아시아 근대성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점이 20세기 들어 중국을 비롯한 세계적 동양철학자들이 양명학에 주목한 이유이기도 했다.

정교수는 "상공업 계층의 직업윤리에 관심이 많았던 양명학은 자본주의 시대인 오늘에 더욱 새롭게 읽히는 측면이 있다"고 강조한다.

배영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