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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 문화

남을 배려하는 한국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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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공중전화에 돈이 남으면 뒷사람을 위해 수화기를 얹어둔다. 일본 기자가 이걸 눈여겨봤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한국인'이란 제목의 기사를 썼다. 일본 사람들은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이 글을 본 우리나라의 한 사회학자가 이런 취지의 글을 썼던 것 같다. 일본 사람들은 전화기에 돈이 남아도 그 돈을 국가가 국민을 위해 쓰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수화기를 망설임 없이 내려놓는다. 하지만 우리는 남을 위해서라기보다 나라에 공돈 주기가 아까워 수화기를 올려놓는다.

이런 생각은 좀 얄밉다. 남의 칭찬에 꼭 이렇게 초를 칠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동전이 없어 전화를 못 건 다급한 경험들도 있고 하니 자신도 모르게 그런 배려가 나온 것이지, 도둑놈들에게 내 돈을 한 푼이라도 그저 뺏길 수 없다는 심정이기까지야 했겠는가 말이다. 하기야 위정자란 사람들이 온통 나라를 말아먹는 도둑놈처럼 보이던 시절을 우리는 건너왔다.

10년 전 운전을 갓 배워 지방도로로 나섰을 때의 일이다. 대낮인데 맞은편에서 오던 차량이 갑자기 전조등을 두어 번 깜빡깜빡 했다. 그 다음 차도 다시 나를 향해 전조등을 켰다 껐다 했다. 내 차에 무슨 문제가 있어 저러나 싶어 순간 당황했다. 옆에 탔던 사람이 "앞에 경찰이 있으니 주의하란 뜻이야"라고 일러줬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리막길 저편 나무 뒤에 숨어 있는 경찰이 눈에 들어왔다.

운전 관록이 쌓여가면서 맞은편 차가 신호를 보내오면 고맙다는 응답까지 할 정도가 됐다. 후의를 받기만 할 수 없어 가다가 경찰이 보이면 나도 맞은편 차에 신호를 보내주기 시작했다. 그때의 뿌듯함이라니. 맞은편에서 퉁겨주는 신호는 "네 앞에 경찰이 지금 입을 떡 벌리고 기다리고 있으니 조심해"라는 메시지였고, 천천히 지나가면서 오늘은 왜 이렇게 걸리는 차가 없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는 단속원의 모습을 보는 것은 미상불 통쾌하기까지 했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한 한국인 상은 비단 공중전화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운전자들 사이에 한때 불문율처럼 굳어진 이 야릇한 신호 동작이 누군지도 모를 상대방이 경찰의 단속에 걸리는 게 안타까워 어떻게든 이를 막아보려 한 동포애적 배려였다고는 나도 생각지 않는다. 숨어서 몰래 덫을 쳐놓고 걸려들기만을 기다리는 비신사적 단속에 대한 반감이랄까, 오히려 상대의 떳떳지 못한 노림수를 무위로 돌리고 말겠다는 오기 같은 게 더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규정 속도를 안 지키고 과속하는 것이 좋은 일일 수 없다. 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고 단속하는 경찰을 나쁘다고 나무랄 일도 아니다. 하지만 함정을 파놓고 걸려들기만 기다린 그 방법이 나빴다.

훌륭한 정치의 방법을 묻는 제나라 선왕(宣王)의 질문에 맹자는 백성이 죄에 빠지기를 기다려 뒤따라가 형벌을 주는 것은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진 임금이 되려면 망민(罔民), 즉 백성을 그물질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했다. 교통법규 위반 단속을 두고 맹자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겠지만, 잘못한 사람에게 잘못을 지적하면 반성은커녕 재수 없어 걸렸다고 생각하게 하는 상황은 참 곤란하다. 이것은 공권력의 체통과 관련되는 문제다.

다행히 5, 6년 전부터 단속 지점을 예고하는 팻말이 붙고 곳곳에 자동 속도감지기가 설치됐다. 이제 맞은편에서 깜빡깜빡 던져주는 신호는 서운하게도 더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하기야 이것이 무슨 미풍양속이라고 그리워한단 말인가? 시스템이 바뀌자 자연스레 없어진 것이다. 불합리한 제도가 만들어낸 미풍양속들이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이제는 차에 장착된 내비게이터가 "주인님! 바로 앞에 속도감지기가 있습니다"라고 보고해 주는 세상이 됐다. 바야흐로 우리는 점점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일까?

정민 한양대 교수,한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