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사람] 인문교양서 전문 번역가 김석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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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인문교양서 전문 번역가 김석희(50.사진)씨. 김씨가 직업 번역가의 길을 걸어온 지난 15년간은 우리 사회에서 번역에 대한 인식이 전에 없이 고양된 시기다.

번역을 2차 작업이라고 폄하하던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이제는 김씨처럼 번역만으로 생계를 꾸려가겠다고 작정하는 젊은 세대들도 나오고 있다.

번역의 양과 질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김씨는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이기도 하다. 시오노 나나미의『로마인 이야기』시리즈를 전담 번역하고 있으며, 최근에『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실크로드 이야기』『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아름다운 이야기』를 비롯해 지금까지 1백50권을 번역했다.

-좋은 번역의 기준이 있다면.

"번역은 한국의 독자들이 편하고 쉽게 읽을 수 있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책을 가까이 하도록 유도하는 적극적 행위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읽히지 않는 정답 번역보다 읽히는 오역(誤譯)이 더 나을 수 있다."

-원본을 먼저 충실하게 독해해야 한다는 점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인데.

"번역(飜譯)의 '번'자는 뒤집을 번자다. 번역은 원문을 뒤집는 것이다.그럴려면 텍스트에 갇혀 있어도 안되고 사전 속에서만 헤엄쳐서도 안된다. 사전이란 죽어 있는 말들의 뜻풀이일 뿐이다. 좋은 번역은 우리 글 속에 완전히 녹아 든 번역이다. 우리 말에 대한 소양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번역은 또 하나의 글쓰기다."

-그렇다면 원본과 번역본은 어떤 관계인가.

"출발지인 원문에 충실할 것인가 아니면 도착지인 번역문을 유려하게 할 것인가. 사실 이 둘은 대립관계가 아니라 필수 조건이다. 또 원문에 충실해야 할 것도 있고, 우리말에 충실해야 할 것도 있는 등 케이스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어느 한 쪽에 비중을 조금 더 두느냐의 갈등이 생기는 지점에서 나는 번역문의 우리말 소통을 중시한다."

-시행착오는 없었나.

"10여년 전에 번역한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지난해 저작권 계약을 하고 다시 펴내려고 보니 안되겠다 싶어 다시 번역했다.『털 없는 원숭이』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새로 펴낼 기회를 갖게 돼 부끄러운 부분을 손질했다. 재번역 하는 일도 우리 출판계에 필요하다."

-얼마만큼 해야 번역만으로 생계가 가능한가.

"씀씀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1년에 적어도 5권 이상은 해야 한다. 나는 평균 10권씩 해 왔다."

-중역을 어떻게 봐야 하나.

"원론적으로 원문 1차번역이 옳다. 하지만 해당 언어 숙달자가 부족한 현실에서 아직 중역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내가 번역을 시작할 때만 해도 중역이 80%가 넘었으나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평소에 어떤 책을 주로 읽나.

"번역 과정에 참고서적을 찾다 아예 그 쪽 방면의 책에 푹 빠지는 경우가 많다. 지적 욕구를 채우는 번역의 즐거움이기도 한데 그러다 보면 잡학박사가 되는 것 같다."

-잡학 지식은 다시 소설을 쓸 때 큰 자산이 되지 않을까.

"번역이 나에게 조강지처라면 소설창작은 애인같다. 멀리 있어도 가끔은 보고 싶은 그런 얼굴이 소설창작이다. 몇 년 후 제주도로 귀향할 예정인데, 그 때 3~4권은 쓸 수 있을 것이다."

글=배영대.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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