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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평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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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학생들에게 기축통화에 대해 강의한다. 기축통화를 보유한 국가는 일정한 한도 내에서 돈을 찍어냄으로써 외국의 상품을 살 수 있고 외채도 갚을 수 있다. 그리고 국가의 재무구조가 그리 건전하지 않아도 저금리로 외채를 조달할 수 있으며,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과감한 재정적자와 초저금리를 운용해도 탈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세계금융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작년 3월에 작성되었던 국채들의 건강검진표를 보여준다. 민간부채, 정부부채, 외채, 경상수지의 상황을 종합해 보면 우리보다 불량한 데도 미국과 서유럽의 국가들은 우리보다 높은 신용등급을 받고 우리보다 낮은 위험 프리미엄을 누리고 있다. 이쯤 되면 학생들의 눈빛이 번득이기 시작한다. 『다빈치 코드』와 『화폐전쟁』만 읽고 나면 이들은 국제금융시장 음모론의 신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국제금융시장의 풍경이 그리 낯설지 않다. 이 땅에서 중소기업을 하는 사업가라면 웬만한 대기업보다 건전한 재무구조를 갖고 있어도 고금리와 부도위험에 시달려야 하는 설움에 이력이 나 있다. 굳이 국제금융시장과의 차이를 따진다면 잘나가는 재벌이라도 화폐발행권은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이 독점하고 있지 않다면 화폐발행권을 대기업이 차지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음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세계중앙은행이 부재한 상태에서 미국이 기축통화국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19세기 후반 절정에 달했던 금본위제도는 국제거래의 대부분을 금을 사용해 결제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국제결제수단으로서의 금은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첫째, 공급량이 제한되어 있어 빠른 속도로 팽창하는 세계 생산과 무역을 받쳐줄 수 없다. 둘째, 이자가 붙지 않는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망할 가능성이 없고, 유동성이 높은 금융시장을 가진 국가가 발행한, 이자를 지급하는 채권이 자연스럽게 금의 역할을 대체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 복구사업으로 쩔쩔매는 동안 달러가 압도적인 기축통화가 되었고, 그 후 통합에 성공한 유럽의 유로가 또 한 축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국제무역을 위해 기축통화가 탄생하고 이를 보유한 국가가 특권을 누리는 것은 샘이야 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제 삼아야 할 것은 기축통화를 보유한 국가가 자국 금융기관의 이익을 위해 신흥국에 압력을 넣어 금융시장을 개방하는 에이전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신흥국 금융시장 개방의 공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필자는 이 역할이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기축통화와 확실한 연결고리를 만들어 놓지 않고, 비상시 자본의 과격한 흐름을 통제하는 장치도 없이 신흥국이 금융시장을 완전 개방하는 것은 수영도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를 튜브도 없이 바다에 내어 놓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세계금융위기 발발 이후 신흥국이 금융시장을 여과 없이 개방하는 것에는 득보다 실이 많다는 의견이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다. 그리고 최근 국제통화기금(IMF)마저도 이러한 의견에 동조하는 연구를 내놓고 있다. 한편 그동안 너무나 밀착되어 있었던 미국 정부와 월스트리트 사이에 보기 좋은 틈이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G20 정상회담은 한국이 신흥국을 대표해 글로벌 금융안전망 없이는 금융개방도 없다는 원칙을 천명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최근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은행세의 형태에 대해서도 우리의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있다. 토빈세가 곤란하다면 금융기관의 비예금성 단기외채에 대해 일반채무보다 중과세하는 은행세를 제안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기축통화의 특권을 누리던 유로의 주변국들이 무너지면서 국제금융시장의 비대칭성이 축소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환율관리에 지나친 자신감을 보이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유로의 수난은 국제금융시장이 불평등을 해소하는 과정이 아니라 허약한 줄기를 핵심 축에서 분리해 내는 잔인한 과정이며, 고정된 환율이 개방된 자본시장과 결합했을 때 발생하는 위험에 대한 또 한 번의 경고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송의영 서강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