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헌 돈이 부푸는 이유'속 삶 표현 짧지만 강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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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61면

'달' (정나란)은 사유의 새로움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번 응모작품들 중 자기 생각을 가장 독특하게 표현한 한편을 뽑으라면 단연 이 작품이다. 생각이 새롭다는 것은 세계와 사물을 보는 자기만의 '눈' 이 있다는 것의 방증.

언제쯤 명명백백해질 수 있을까.

엉뚱하게도 나는 백 개의 달을

안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고

와르르 쏟아져 내려 여기저기 굴러가 버리는

나의 달을 뻥뻥 차고 다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백 개의 달" 운운하는 첫마디의 발언부터가 엉뚱하고(즉 낯설고) 사유를 굴려가는 말의 운행 솜씨가 만만치 않으며 이러저러한 기상(奇想)들을 흩뜨리지 않고 "줍는다" 는 단일한 행위 동사로 끌어모아 상상력을 한껏 배가시키는 솜씨도 볼 만하다.

다만 흠이 있다면, 한 심사자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사유의 새로움이 표현의 새로움으로 이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둘 사이의 간극을 좁혀주는 (혹은 밀착해주는) 결정적인 촉매가 체험이다.

'달' 의 후반부가 "어린 왕자" 운운하면서 맥없이 주저앉아버린 것은 모처럼의 새로운 사유를 이 작가의 체험이 끝까지 보증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좋은 시는 생각 반, 표현 반이 아니다. 생각 편에서는 그것이 전부요, 표현 편에서는 또 그것이 전부다.

즉 간극이 느껴져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달' 은 빼어난 작품이다. 그러나 한쪽이 이지러진, 안타까운 작품이다.

'헌 돈이 부푸는 이유' (채향옥)는 언뜻 보면 너무도 평범하다. "수금해 온 낡음낡음한 돈을 세다 만난" 서툰 글씨의 "이상순 침목계 돈" 오만원 뭉치를 보고 어느 한 장도 흩어지지 않은 채 여기까지 온 그 놀라운 결속에 대해 천진한 기쁨을 토로하고 있는 시다.

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작품에 특별한 시적 장치가 있다면 "낡음낡음" "벙글벙글" 정도. 그러나 이 의태어들을 지시어에 갖다 대는 순간 돈은 그냥 무표정한 교환가치가 아니라 아리고 매운 생활에 낡음낡음 (이 얼마나 고소한 우리말이냐!)해졌지만 때로는 볕살 좋은 친목계 날에 모여 생기를 자랑하기도 하는 우리의 이상순씨들의 정겨운 얼굴로 살아나는 것이다.

낡은 돈에서 읽어내는 생활하는 사람들의 무거우나 밝은 미소, 이 시는 그 미소를 극대화한 아름다운 소품(예술의 세계에 무슨 대품.소품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 규모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이다.

규모가 작기는 같은 작가의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다. '달' 의 작가와 달리 이 시인에게는 생래적으로 체험을 감각화하는 언어가 특히 발달해 있는 것 같은데 감자 줄기가 뻗어가는 모습을 "더듬더듬 기는 줄기 끝 밝은 눈 있어" 같은 재미스런 표현이나 "오톨도톨 살갑다" 같은 표현으로 간명히 처리한 것이 그렇다.

'헌 돈…' 가 그러했듯 '어머니' 역시 짧지만 어느 긴 시 못지 않게 꽉 찬 삶의 열기를 감자처럼 서늘히 안으로 품은, 알이 굵은 작품이다.

모든 선의가 다 훌륭한 시가 되는 건 아니지만 모처럼 삶의 내용에 헌신하고 열망할 줄 아는 젊은 시인을 만난 기쁨이 크다.

채향옥씨의 앞의 두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며 우리는 또한 요즘 들어 시가 쓸데없이 길어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엄한 경계로 삼고자 한다.

끝으로 마지막까지 남았던 이들의 작품과 이름을 적어 그들 또한 격려해 마지 않는다. 이분들이 있어 우리 시는 결코 쉬지 않는다.

'재개발지구' 의 폭발적인 길소규, '꽃사과를 자르며' 의 단단한 양해기, '게장을 담그며' 의 유머러스한 홍정연, '포정의 칼' 의 예리한 우종숙, '심봉사 한강수에 빠지다' 의 해학의 황인산, 그리고 그밖에 도형주.윤현주.하재연.문신.주혜옥.한용국.김민하.박현수.유재혁.최섭 제씨들.

<심사위원 : 황동규.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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