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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연극배우 고 고설봉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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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난 16일 89세로 타계한 연극배우 고설봉(高雪峰)씨는 '살아 있는 한국의 연극사(史)' 였다. 그는 평생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단역이든 조역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또 뛰어난 기억력으로 근.현대 연극사를 구술하고 책을 펴내 우리 연극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고인은 대중극(大衆劇) 계열의 원로배우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무대를 지켰다. 지난해에는 미수(米壽.88세) 기념 무대인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에 출연해 노익장을 과시했다. 한국의 근.현대 연극은 크게 두 분파로 발달해 왔다.

일제시대 일본 유학생 출신들이 모여 엘리트 연극을 추구한 '극예술연구회' 가 신극(新劇)의 큰 줄기였다면, 그 반대편에는 신파극 류의 대중극이 있었다. 고인은 생전에 "일제의 꼴이 보기 싫어 연극배우가 됐다" 고 말하곤 했다.

高씨는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를 졸업했고, 경기도 고양군에서 면서기를 하다 24세 때 연극에 뛰어들었다. 그는 1930년대 흥행 공연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동양극장(현 문화일보 자리)의 전속 극단 가운데 하나인 청춘좌에 입단해 '사비수와 낙화암' 로 데뷔했다. 단역이었지만 기꺼이 맡았다.

그는 역할의 크고 작음에 연연하지 않고 연기 생활 60여년 동안 연극 5백여편, 영화 3백여편에 출연했다. "연극이나 영화는 주연 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게 고인의 연기철학이었다. 연극배우 원영애씨는 "조금만 이름이 나도 작품을 고르는 데 신경쓰는 후배들에게 高선생님은 귀감이 됐다" 고 회고했다.

高씨는 기억력이 탁월했다. 그 덕분에 우리 연극사의 구술작업에 탄력이 붙었다. 그는 일제시대 동료 배우들의 한자 이름은 물론 자신이 출연한 신파극의 스토리 라인을 줄줄 외웠다.

그는 최근 방영된 TV드라마 '동양극장' 의 제작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 드라마는 그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고인은 '반쪽짜리' 연극사를 복원하는 데 애썼다. 그는 『이야기 근대 연극사』 『증언 연극사』 『빙하시대의 연극마당, 배우세상』이라는 세권의 증언집을 냈다. 이 구술사는 한국의 대중극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그는 이런 증언을 통해 학생극 수준이었던 극예술연구회 활동에 치우친 한국 연극사 연구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또 월북 예술가들을 관대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와 함께 구술 작업을 많이 했던 서울산업대 김미도(37.여.연극평론가)교수는 "지금도 '신극' 전통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의 한국 연극에서 고인이 구술을 통해 복원한 대중극의 역사는 높은 가치를 지닌다" 고 평가했다. 고인 덕분에 해방 이전 관련 자료의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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