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과학자들 열강에 미래 과학자 눈빛 반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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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 알죠? 그 속담이 유전학의 핵심 원리예요.” 수원 경기과학고등학교 1학년 7반. 21일 오후 이 교실에선 나도선 교수(울산의대 생화학분자생물학)의 생명과학 강의가 있었다.

학생 16명이 귀를 기울였다. ‘종의 기원’을 발표한 다윈이 백수였다는 말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또 “독실한 기독교인인 부인 때문에 20년 동안 진화론을 발표하지 못했다”는 말엔 놀랍다는 반응이 나왔다. 나 교수가 “DNA 이중 나선 구조를 밝혀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묻자 학생들은 “웟슨&크릭(제임스 웟슨, 프랜시스 크릭)”이라고 곧장 답했다. 나 교수가 여성 과학자로서 겪었던 곤란과 좌절을 이야기할 땐 여학생들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맞은편 교실에서는 이승구 전 과학기술부 차관의 이야기가 한창이다. 강의 내용을 노트북으로 받아 적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디지털카메라로 수업장면을 찍는 학생도 있다. 이 교수가 “과학기술 분야에서 여러분이 최고의 영웅이 되길 바란다”며 강의를 끝맺자 학생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원로 과학자들의 모임 ‘과우회’ 회원인 나도선 울산대 의대 교수가 21일 경기과학고에서 생명과학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조용철 기자]

과학 영재들이 모인 경기과학고에 대선배들이 찾아와 ‘열혈 강의’를 했다. 원로 과학자들로 구성된 과우봉사단의 ‘찾아가는 과학교실’이 열린 것이다. 2007년부터 전국의 초·중·고교를 찾아다닌 지 4년째. 지금까지 70여 곳이 넘는 학교를 방문했다. 입소문이 나 이제는 학교에서 먼저 찾는다. 이날 특강도 경기과학고 학부모들이 과우봉사단에 연락해 마련됐다.

박승덕 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 이관 전 과학기술부 장관, 봉종헌 전 기상청장 등 13명의 원로 과학자가 한반씩 맡아 자신의 전문분야를 강의했다. ‘인간과 우주’ ‘태풍과 황사 이야기’ ‘원자력의 세계’ 등 다양한 주제를 학생들 앞에 펼쳤다. 학생들의 반응은 뜨겁다. 강세현(16)군은 “과학지식뿐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들어 더 큰 꿈을 꿀 수 있게 됐다”며 웃었다. 정재아(16·여)양은 “13개 강의를 다 듣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라며 “열심히 공부해서 저렇게 지식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과우봉사단은 원로 과학기술인들의 친목모임인 과우회에서 시작됐다. “우리가 가진 지식을 나누자”는 데 뜻을 모은 105명이 2006년 11월 봉사단을 만들었다. 2007년 3월부터 서울 강남구청 자원봉사센터에 소속돼 활동하고 있다. 회원의 90% 이상이 60세를 넘어섰다. 전직 장관, 교수 등 경력도 다양하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과학특강부터 과학관 전시해설, 인터넷을 통한 과학상식 보급까지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가을 시작한 과천과학관전시해설 봉사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김대석 사무총장(전 서울과학관장)은 “할아버지가 쉽게 설명해주니 아이들이 졸졸 쫓아다닌다”며 “현직에서 일할 때와는 또 다른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권오갑 봉사단장(전 과학기술부 차관)은 “어렵고 딱딱한 과학을 재미있게 들려주기 위해 매일 고민한다”며 웃었다.

박승덕 회장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이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며 “우리를 찾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간다”고 강조했다.

글=임주리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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