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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사람들은 평생 뭔가를 공부한 사람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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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조전혁 의원은 와이셔츠 차림으로 기자를 맞았다. 사진을 찍는다고 하자 재킷을 입기보다 오히려 양 소매를 걷어붙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동연 기자

조전혁 의원은 1960년생이니까 나이로 보면 79학번이다. 근데 고등학교(가야고 졸업)를 4년 다녀 80학번이다. 이유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지만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 사귄 친구가 지금의 와이프다. 초등학교 졸업 후에도 계속 만나다가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1년에 360일을 만날 정도로 미친 듯이 연애를 했다고 한다. 그는 부인에게 두 번의 선거에서 도움을 받았다. 처음은 초등학교 학교회장 선거였고 두 번째가 총선이었다. 부인이 가끔 ‘100% 당선시켰다’고 자랑한다고 한다.

-정치에 대한 꿈이 있었나.
“아니다. 정치를 하게 된 과정을 보면 내가 얼마나 무모한 인간인지 드러난다. 2008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되면서 박근혜 캠프와 이명박 캠프가 서로 사람을 당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상운동을 하는 단체의 대표가 경선캠프에 들어가는 건 좀 어렵다고 판단했다. 박 캠프의 유승민·최경환은 위스콘신에서 공부를 같이했고, 이 캠프의 곽승준·박형준은 다 친구들이다. 거절하기 곤란했지만 다 안 간다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가 된 후에도 그 캠프에 안 들어가고 이주호 차관하고 한나라당 대선공약을 만드는 팀에 들어갔다. 이후 인수위에 들어가서 일을 한 뒤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교육문화수석 얘기가 나오더라. 정말 죽겠더라. 나 같은 한밤중 인간이 새벽 5시부터 움직이는 대통령 밑에 가면 죽을 거 같더라. 오라면 안 갈 수도 없고…. 근데 이주호 차관이 갔다. 그래서 한숨을 돌렸는데 공천 마감 이틀 전에 전화를 받았다. 인천 남동을을 찍어서 나가라고 했다. ‘미쳤나’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이번엔 와이프한테까지 전화가 왔다. 이명박 교육정책을 만든 사람인데 그거 실패하면 어쩔거냐며 국회 쪽에서 서포트를 해야겠다는 거다. 거절할 수 없었다. 30분 기다리라고 하고 와이프와 상의했는데 ‘미쳤느냐’ 했더니 알아서 하라고 해서 30분 만에 출마를 결정했다.”

교육은 최선의 경제·복지·사회정책
-의원 하니 이전보다 더 좋은가.
“사람들이 다 의원 하면 좋다고 하던데 나는 잘 모르겠다. 특히 자랑스러울 것도 없고…. 법안 발의를 할 수 있고, 이런 거(전교조) 발표할 때 주목 받는 건 좋다. 교수보다 세상을 바꾸는 데 다이내믹하고 임팩트는 세다. 그래도 아직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시민운동 연장선상에 있는 거 같다. 다만 얼굴이 많이 팔려 ‘조전혁 교수의 은밀한 사생활’은 사라졌다. 뭐 거창한 거는 아니고 술 먹는 거와 같은 거다.”

-추진력이 대단한데.
“원래 뭐 하면 다 배수진 치고 한다. 이번 명단 공개할 때 의원 면책특권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본회의나 상임위에서 명단을 밀어넣고 서면으로 보고하면 속기록에 남고 다 공개된다. 근데 면책특권 뒤에 비겁하게 숨고 싶지 않았다. 헌법논쟁으로까지 가고 싶다. 전교조가 심각한 사생활 침해라고 하니 그게 진짜 그런 건지 아닌지 따져보고, 설사 사생활이라고 하면 그게 공적인 이익을 위해 희생될 수 있는 사생활인지, 노출돼서는 절대 안 되는 정보인지 따져볼 거다. 그런데 전교조가 스스로 공개한다고 하니 자가당착 아닌가. (조 의원은 ‘교원단체 소속 교사의 실명을 공개해선 안 된다’는 서울남부지법의 결정이 의원의 권한을 침해했다는 뜻의 권한쟁의 심판을 23일 헌법재판소에 청구했다.)

-나름의 교육관이 있을 거 같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교육은 최선의 경제정책’이라고 말했다. 근데 나는 ‘최선의 경제정책일 뿐 아니라 최선의 복지정책, 사회정책이고, 역사변수”라고 생각한다. 성공한 개인들을 보면 평생 뭔가를 공부한 사람들이다. 사원 교육을 잘 시킨 기업이 잘 되고 잘된 집안, 잘된 국가도 반드시 성공한 교육시스템이 있었다. 개인·집안·기업·국가의 역사를 결정하는 게 교육이라는 생각이다. 교육이라는 말도 바꿀 필요가 있다.”

-교육이라는 말을 바꾼다는 게 무슨 뜻인가.
“교육 관련해서 정명(正名)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개념이나 이름이 현실을 결정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념 성향을 보수·진보로 가르기보다 우파·좌파로 나눈다. 그러면서 나는 항상 진보우파라고 얘기한다. 진보 운동 하는 사람이 철 지난 50, 60년대 이론을 들고 나온다. 그들이 우리를 수구 골통이라는데 나는 그들을 수구좌파라고 얘기한다. 우파에서 진보우파가 나왔으니 이제 당신들이 진보좌파하라고 얘기한다. 교육 관련해서도 교육은 어떻게 보면 피동적이다. 가르치는 교사가 있고 학생은 그걸 받아먹는 개념이다. 그게 아니고 학습이란 개념이 돼야 한다. 자기가 스스로 배워서 습득하는 개념이 돼야 한다. 문제 풀이가 아닌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는 게 교육이자 학습이다. 국가가 아이 가르치는 시스템 이름을 교육이 아닌 학습으로 바꿔야 한다. 교사가 주는 것으로 이름을 해두면 시스템도 그렇게 갈 수밖에 없다. 아이들 스스로 문제 해결할 수 있는, 이름이 유도하는 시스템도 있지 않느냐. 그런 게 필요하다. 일종의 넛지 비슷한 효과가 있다.”

-전교조와 정면 승부를 펼치는 데 든든한 후원자라도 있나. 우스갯소리로 고려대동문, 호남향우회, 해병전우회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센 단체라고 하지 않나.
“할아버지가 황해도 해주 분이다. 서당 훈장을 하셨는데, 그 당시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했다. 1923년 세상이 바뀌었다며 상투를 자르고 일본 가서 양복 재단 기술 배워 한국에 돌아와 마산에 정착하셨다. 아버지는 1918년생이시고, 6살 때 마산에 와서 학교를 다녔다. 직장이 한국전력이었다. 옮겨 다니며 근무하다 나는 광주서 태어났다. 그래서 원적이 광주다. 출마 때 호남향우회 사람들이 와서 ‘거짓말 아니냐’고 하다가 얘기를 듣더니 그냥 가더라. 그리고 나는 ‘해병대’ 출신이다. 해병대는 발음을 잘 들어야 한다. ‘해변대’ 해안선에서 방위(단기사병) 근무를 했다. 고대 나온 건 다 아는 얘기고….”

-조부에게서 물러서지 않는 기질은 받은 거 아닌가.
“할아버지가 해방되고 자유당 시절 민주당 경남 도당위원장을 했다. 당신은 선거 출마한 적 없지만 돈이 있어 경남에서 출마하는 야당 후보들 지원을 해주셨고, 화끈하게 쓰신 거 같다. 나중에는 아버지께도 빚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돌아가시며 유언이 우리 자손은 절대 정치하지 말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2000년 돌아가셨는데 살아계셨다면 정치하기 쉽지 않았을 거다. 할아버지는 얼굴도 못 뵈었으니 그 유훈까지는 안 지켜도 괜찮을 거 같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많이 말리셨을 거다.”

전교조 안 미워한다. 적 아니다
-전교조를 없어져야 하는 단체로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나는 사실 전교조 안 미워한다.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교조는 나를 시장지상주의자, 고정된 프레임을 가지고 고집불통에 골통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이상한 사람들이다. 나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판단하지 않는다. 상태가 괜찮은 건지만 본다. 이런 일이 있었다. 재개발 업자가 돈 번다고 하고 재개발 추진하다 문제가 생겼다. 주민들 앞에서 전문가를 통해 재개발이 득이 되는지 과학적으로 검증해보자고 했더니 옆에 있던 사람이 옆구리를 찌르더라. 친한 사람이었는데 철거 업자였다. 그 사람이 돈을 벌든 말든 상관없다. 주민이 중요하다. 전교조 문제도 그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거다.”

조 의원은 지금도 집이 없다. 2010년 공직자 재산등록 때 신고한 재산이 1억900만원이다. 보증을 섰다가 외환위기 때 집을 잃었다. 조 의원은 집 살 생각을 하면 생활이 불편해진다며 돈 모으겠다는 생각도 없고 즐기며 살 생각이다. 그는 즐기는 걸 좋아한다. 틈이 나면 바둑을 두거나 골프를 쳤다. 둘 다 수준급이다. 골프는 4언더까지 쳐봤고 바둑은 아마 4단 정도인데 그게 초등학교 실력이라고 한다. 의원이 된 이후에는 시간이 아까워 그 두 가지를 포기했지만 자녀들 때문에 즐기는 걸 포기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집 없는 의원, 재산 1억900만원
-자녀가 모두 미술을 한다고 들었다.
“딸만 둘이다. 이번에 둘째가 국민대 디자인학과(조형대학)에 들어갔다. 첫째도 미술이 전공이다. 첫째는 국민대 디자인학과에 지원했다가 공부했던 파스텔을 당일에 못 쓰게 하는 바람에 떨어졌다. 재수를 하겠다고 해서 ‘미친 짓’이라며 안 된다고 했다. 그때 숙대는 붙어 있었는데 그냥 다니며 1년간 다른 공부를 하는 게 낫다고 했다. 딸아이가 말을 듣지 않았다. 재수해서 서울대를 가겠다는 거였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되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했다. 그랬더니 옆에서 와이프가 ‘장 지지지 말고 교회에 나가자’고 했다. 딸은 결국 재수해서 서울대 미대에 갔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 나가게 됐다.

-둘 다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나도 사실 고1 초까지는 미대에 가려고 했다. 누나가 다섯인데 그중 셋의 전공이 미술이다. 유전자가 있는 거 같다. 우리 애들은 예원, 예고 같은 학교에도 안 갔고, 고1이 지나서 늦깎이로 미술을 시작했다. 둘 다 그랬다. 둘째는 유학 시절에 미국서 태어나서 이중 국적자다. 고모가 미국에 있기도 해서 유학을 갈 여건이 됐고 주변에서 권했지만 보내지 않았다. 본인도 싫다 하고 나도 싫었다. 나는 그래서 교육제도와 관련, 아이들 문제는 떳떳하다고 생각한다. 고액 과외도 안 시켰다. 딸아이가 서울대 진학을 위해 그동안 안 했던 수학을 공부해야 했다. 한 달에 100만원짜리 과외를 시켜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못 시켜준다고 했다. 딸아이가 엄마, 아빠 골프 치는 거 한두 번만 안 쳐도 되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너희들에게 올인할 생각 없다. (재수는) 네가 한 거지 내가 시킨 거 아니다’라는 말도 해줬다. ‘네 인생은 네가 책임져라.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기회는 많이 주려고 했다. 그렇다고 호사스러운 기회를 준 건 아니다.”

-그래도 기본이 있었던 거 아닌가.
“애들 키워보면 저력은 결국 독서에서 나온다. 나도 어려서부터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명작이든 고전이든 만화, 무협지까지 닥치는 대로 봤다. 큰애도 어릴 때 책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두 시간씩도 있었다. 그런 것이 수학을 늦게 공부했는데도 힘을 발휘하더라. 아이들이 경제관념이 뛰어나다. 큰 아이는 대학에 들어가 용돈을 안 받았다. 자기가 그림학습서, 붕가붕가레코드 앨범디자인, 축제 관련해서 디자인도 해주고 돈 잘 벌더라. 자기 재수할 때 ‘기회는 주지만 잘못되면 맥도날드 가서 그릇이나 닦으라’고 했다. 딸아이가 우리 아버지는 그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정신이 바짝 차렸다고 하더라.”

-앞으로 역점을 둘 법안이 있나.
“사학법 폐지와 특정 교육 관련 범죄 가중처벌법을 만드는 거다. 두 법은 쌍끌이 법이다. 촌지는 뇌물이다. 그것도 정명(正名) 대상이다. 뇌물 받고 횡령하고, 이런 사람들은 다시는 학교에 발을 못 붙이게 해야 한다. 교육은 공공성이 워낙 크다. 그런 만큼 자율을 이용한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는 무한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사전규제는 나쁜 거다. 그건 대통령이 얘기한 전봇대 같은 거다. 뽑아내야 한다.”

-꿈이 있다면.
“학교가 정상 기능을 못한다. 학교는 정규시장이다. 사교육 암시장이 생겼다. 암시장은 돈으로 프리베팅하는 시장이다. 가난한 집 ‘똘똘이’가 부잣집 ‘띨띨이’를 못 당한다.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효율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효율·형평 모두 올려야 한다. 교육을 통해 사회계층의 수직이동이 가능해져야 한다. 그게 꿈이다. 이기수 고려대 총장에게 얘기한 적이 있다. 최상위 학생이 아닌 상위 15~25%에 드는 학생을 전략적으로 뽑아 일류를 만들어 볼 것을 제안했다. 부족하면 5년 과정 만들어서 1년 다지고 4년 가르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프로그램 만들면 각지에서 성금이 답지할 거다. 고대가 사립대지만 그런 게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거다.”

송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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