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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 저널리즘 리포트] 침몰 23일째 금양호 선원 그들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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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후 48세. 98금양호 선장. 경기도 안산 출신. 20여 년 동안 배를 탔다. 활달한 성격에 리더십이 뛰어나 선원들이 아버지처럼 따름.

허석희 33세. 98금양호 실종 선원. 고향은 해남. 평소 말이 없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성실하다는 평판.

김종영 41세. 98호와 짝을 이룬 97금양호 선장. 허석희와는 친형제 같은 사이로 7년 전부터 알고 지냄. 98호 침몰에 죄책감 느끼는 인물.

김종평 55세. 98금양호 사망 선원. 고향은 인천. “사람 좋은 종평”으로 부두에서 소문난 인물. 3일 가장 먼저 시신으로 발견됨.

이삼임 56세. 김종평의 동거녀로 6년 전부터 사실혼 관계.

람방 누르카요 36세. 인도네시아 국적. 아내와 두 아들을 위해 2년 전 한국에서 취업. 2~3년 후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음.


침몰 당일 금양호

‘98금양호’가 지난 2일 오전 천안함 실종자 수색작업을 나가기 위해 백령도 앞바다에서 대기하고 있다. ‘98금양호’는 이날 밤 인천시 옹진군 대청도에서 서쪽 으로 48㎞ 떨어진 해상에서 침몰됐다. [백령도=뉴시스]

“나랏일인데 도와야지.” 재후(98금양호 선장)가 선원들의 얼굴을 힐끗 봤다. “아무렴.” 답변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손가락을 열두 바늘이나 꿰맨 용상도, 한국말이 서툰 람방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하루 일을 못하면 1000만원 이상 손해인데.” 그들에게 돈은 곧 ‘목숨’이었다. 재후가 다시 나섰다. “나랏일에 도움이 된다면야….” 억센 뱃사람들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2일 오후, 쌍끌이 어선 97금양호와 98호는 천안함 침몰 해역으로 길을 떠났다. 실종자 수색작업을 도와달라는 해군의 협조 요청을 받은 직후였다. 파도는 높지 않았다. 오후 3시부터 시작된 수색작업은 곧 중단됐다. 조류에 그물이 찢어진 탓이었다. “돌아가자.” 두 배는 조업구역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오후 8시15분. 바다가 어둑해졌다. 화장실에 다녀오던 종영(97호 선장)은 98호가 희미하게 뒤따르는 것을 봤다. 이어 어둠은 98호를 감싸고 멀어져 갔다. 15분쯤 후 ‘98금양호’는 어둠 속에서 거대한 화물선과 충돌했다. 그리고 그들의 평생 삶터였던 바다 밑으로 스러져만 갔다.

열아홉에 배를 타다  “또래하곤 달라, 일을 얼마나 야무지게 하는지 … 엄마 약값이라며 돈도 지독히 모았지”

실종된 허석희씨 #갑판엔 피바람이 불었다

실종된 허석희씨

석희는 키가 작았다. 1m60㎝ 남짓 될까. 자그마한 몸집을 두고 누군가 농을 걸면 석희는 “쌀밥 한 번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었다”며 웃어 넘겼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그는 아버지를 잃었다. 가난은 지독했다. 숟가락이 없어 손으로 꽁보리밥을 퍼 먹었다. 한창 자라야 할 때 석희는 제대로 먹지 못했다. 키가 작을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를 겨우 마친 열일곱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신문 배달을 하고 자장면을 날랐다. 돈벌이가 되지 않았다. 가스통을 날랐지만 20㎏이 넘는 무게를 작은 몸은 견뎌내지 못했다.

열아홉이 되던 해, 소년은 바다로 갔다. 배를 타면 목돈을 모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작은엄마, 나 속초야.” 오징어를 잡는다고 했다. “육지 생활하면 방도 구해야 되고 필요한 물건도 많잖아. 배에선 옷 한 벌만 있으면 돼.” “위험하다”고 말리는 숙모를, 조카는 달랬다. “자장면 배달로는 당뇨로 아픈 어머니 약값을 댈 수 없으니까.” 석희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이었다.

갑판에 서면 ‘피바람’이 불었다. 모진 바닷바람을 두고 뱃사람들은 피바람이라 부른다. “특히 겨울이 되면 지독하지. 총알받이가 된 것 같다니까.” 종영은 고개를 저었다. 돈이 된다는 꽃게나 꼴뚜기(11~1월), 주꾸미(2~4월)는 날이 추워지면 잡히기 시작한다. 그 바람을 맞으며 그물에 딸려오는 것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뜯어내느라 뱃사람의 손에는 물집이 잡히고 상처가 난다. 석희는 그걸 알면서도 꼬박꼬박 겨울 배를 탔다. “작은엄마, 나 털신 하나만 보내줘요. 너무 추워.”

“그때 더 도톰한 양말을 보내 줄 걸…”. 작은엄마는 가슴을 쳤다.

종영은 그런 석희가 늘 안쓰러웠다. 함께 배를 탄 지 7년. 집도 없이 떠돌던 석희를 데리고 살았다. “피붙이지, 피붙이.” 뱃놈들의 우정이란 그런 거라며 종영은 울었다. 배 정비 하는 일을 배우고 싶다던 석희였다. “2년 만 더 탈 거야. 참한 색시도 얻어야지.” 그렇게 말하는 모습이 대견해 처조카를 소개시켜준 적도 있었다. “또래하고는 달라. 일을 얼마나 야무지게 하는지. 어머니 약값이라면서 돈도 지독히 모았어. 정말 효자였지.”

그날 밤, 그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잘 따라오던 98호가 보이지 않았다. 피붙이 같다던 석희를, 종영은 그렇게 보냈다.

#"아무도 안 와 아무도”

사망한 김종평씨

삼임은 부두 터미널에 노점을 차리고 김밥을 팔았다. 자그마치 30년이었다. 뱃사람들은 거칠었다. 싸움이 잦았다. 종평은 심성이 고왔다. 싸움이 일어나면 그는 항상 말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면 그 거칠던 뱃사람들도 순해졌다. 그런 종평을 지켜보며 삼임은 사랑을 품었다. 노점에서 인사를 나눈 것이 6년 전. 오갈 곳 없는 둘은 정을 나눴다. 삼임은 그렇게 종평의 연인이 됐다.

종평에겐 가족이 없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었다. 그는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과거를 물어보면 친척 밑에서 자랐다고만 했다. 더 물으면 “이모였던가 할머니였던가” 하며 “금방 세상을 떠나 누구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순했던 종평도 공부 얘기만 하면 화를 냈다. “공부를 못한 것이 한이 맺혔었나봐.” 삼임은 그의 영정사진을 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종평에겐 한때 같이 살던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아들 하나를 낳고 말없이 집을 나갔다. 가난했던 청년에게 아이는 짐이 됐다. 핏덩이를 미국으로 입양 보낸 후 종평은 술에 의지했다. 어느 날엔가 술을 마시고 트럭을 몰다 면허정지를 당했다. 야채 배달을 하기 위해 빌린 용달차였다. 살길이 막막했다. “그래서 배를 탔겠지.” 삼임은 눈물을 훔쳤다.

10개월여 배를 타다 육지로 나오면 종평은 늘 쇠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물것(해물)은 싫다고 했다. 정작 고깃집에 가면 고기는 삼임의 입에 넣어주고 종평은 술을 마셨다. 가끔, 아들 보러 미국에 가고 싶다는 말도 했다. 돈을 모으고 싶다면서도 손에 쥔 돈은 노숙자나 좌판을 연 할머니에게 줘버렸다. 삼임이 잔소리를 하면 “내가 집이 있나, 돌볼 자식이 있나. 나야 또 배 타러 가면 되지”라고는 또 술을 마셨다. 돈이 모일 리 없었다. 월 9만원 하는 삼임의 사글세 방에서 함께 지내다가 그마저 여의치 않을 땐 여인숙으로 들어갔다.

98금양호는 5월 30일께 돌아올 예정이었다. 종평에겐 마지막 뱃일이었다. “이젠 너무 힘들어. 좀 사람답게 살고 싶어.” 그런 종평의 생일을 꼭 챙겨주고 싶었는데 그는 차갑게 돌아왔다. 1955년 5월 25일. 출생일이 선명히 찍힌 신분증만 삼임의 손에 남았다. 금양호가 침몰한 후 종평의 시신이 발견되자 신문이며 방송에 그의 이름이 수없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가족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없었다. 반짝하던 추모의 발길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화환만 가득한 빈소를 삼임은 2주 넘게 혼자 지키다 22일 장례를 치렀다. “정말 가족이 단 한 명도 없더라고. 아무도 안 와. 아무도.”

미국에 있을 종평의 아들은 스물여덟 정도 됐을 것이다.

#땅 위에는 집이 없다.

"뱃일을 그만두면 어쩌려고.”

“여관에 뜨거운 물만 잘 나오더라.”

주변에서 타박을 놓으면 종평은 머쓱하게 웃었다. 석희도 종평도 땅 위엔 집이 없었다. 봉조도, 재후도 마찬가지였다. 나머지 실종 선원 모두 그랬다. 여관과 쪽방을 옮겨다녔다. 집을 마련할 돈으로 술을 마셨다. 사람들은 ‘자포자기 인생’이라고 수군댔다. 하지만 1년의 대부분을 바다 위에서 보내는 뱃사람들에게는 차라리 그것이 실속이었다. 결혼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쌍끌이 배를 타보면 알아. 해군 함정은 호텔이야.” 빈소를 찾은 한 선원은 코끝이 벌갰다.

“도망가는 거지. 바다로.” 한 실종 선원의 동생은 헛웃음을 지었다. 배운 기술이 쓸모 없게 돼버려서. 술 먹고 사고를 쳐서. 빚독촉을 못 견뎌서. 자꾸 손 벌리는 친척들을 견딜 수가 없어서. 수배를 받아서. 뱃사람들은 바다로 온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람방도 집이 없었다. 어릴 적 배를 탔던 그에겐 다섯, 세 살 된 아들이 있다. 하루 한 끼 먹이기도 힘들었다. 한국에서 배를 타면 월급이 (인도네시아에서보다) 10배는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국 젊은이들이 배를 안 타 그에게도 기회가 왔던 거다. 그러나 브로커에게 쥐어준 돈은 거금이었다. 한국에서 2년은 꼬박 벌어야 그 빚을 갚을 수 있을 만큼 컸다. 그래서 람방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뱃놈이 술도 못 마시느냐”고 면박을 당해도 하얀 이를 내보이며 그저 웃었다. 람방은 목돈을 모으려고 저인망 어선을 탔다. 1년에 1500만원도 벌 수 있다며 그는 좋아했다. 돈 벌어 귀국해 떵떵거리며 살겠다는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람방의 싸늘한 시신은 10여 일 전 고국으로 돌아갔다.

뱃사람들에겐 노후가 없다. 1년 계약으로 일하는 비정규직이다 보니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6년 전부터는 수협의 어선원보험에 가입하도록 되어 있지만, 실종이나 사망 시 유족에게 보상금을 주는 산재보험이다. 위험 직업군에 속해 민간보험은 꿈도 못 꾼다. 동덕여대 남기철(사회복지학과) 교수가 호소한다.

“선원은 사회보장제도의 사각지대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다. 위험한 직업일수록 사회보장제도 안으로 편입시키도록 정부가 고민해야 한다.”

“노후 대책? 땅으로 나오면 굶어죽어야지.” 종영의 말이다.

#그들은 나랏일을 했다.

20일 오전 98금양호 실종자 7명을 찾기 위한 선박이 사고 해역인 백령도 앞바다로 출발했다. 침몰 19일 만이다. 23일 오전에도 수색작업이 벌어졌지만 역시 실패했다. 실종자 가족들의 합동 분향소 마련도 금양호 인양 후로 미뤄졌다. 물론 기약이 없는 일이다. 금양호가 수심 70m에 있는 데다 사고 해역 주변에 초속 6~8m의 강풍이 계속 불고 있어서다. 인천 송도가족사랑병원에서는 22일 종평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삼임만이 쓸쓸히 그의 영정사진을 끌어안았다. 천안함 장병 46명, 한주호 준위, 그리고 금양호 선원 9명. 그들 모두는 ‘나랏일’을 하다 고귀한 목숨을 나라에 바쳤다.

인천=임주리·심서현 기자


98금양호 사망·실종 선원 명단

사망자=김종평(55), 람방 누르카요(36)

실종자=김재후(48·선장), 박연주(49), 안상철(41), 이용상(46), 정봉조(49), 허석희(33), 하레파 유수프(35·인도네시아 국적)

98금양호 침몰 일지

2일 오후 8시30분쯤 캄보디아 선박 타이요1호와 충돌한 98금양호 침몰. 선원 9명 실종

3일 오전 9시10분쯤 대청도 인근 해상서 김종평씨 시신 발견
오후 7시15분쯤 람방 누르카요 시신 발견. 인천 송도가족사랑병원에 빈소 차려짐

5일 해경, 수색 범위 6마일(11㎞)에서 20마일(37㎞)까지 확대

19일 해경, 기상 악화로 금양호 해저 수색 포기

20일 오전 10시쯤 금양호를 인양하기 위한 바지선 사고 해역으로 출발

22일 김종평씨 장례식

23일 해저 수색 재개했으나 기상 악화로 실종자 발견 못함


◆내러티브 저널리즘(narrative journalism)=기존의 ‘단순 사실 전달식’ 기사 형태에서 벗어나 소설 문장처럼 ‘이야기하듯’ 구성하는 기사 형식. 주요 인물을 추적해 사건의 이면을 보여주고, 사실을 현장감 있게 전달하는 글쓰기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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