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사설

북한, ‘핵보유국’ 미망 서 깨어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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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천안함 침몰 사건과 관련해 북한에 의심의 눈길이 쏠리고 있는 가운데 그제 북한 외무성이 느닷없이 비망록이란 걸 발표했다. 북한은 핵보유국이고, 따라서 다른 핵보유국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국제사회의 핵 군축 노력에 참여하겠다는 것이다. 또 필요한 만큼 핵무기를 생산하겠지만 핵 군비 경쟁에 참가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핵무기를 과잉생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국제사회가 인정하든 말든 두 차례 핵실험까지 한 북한은 엄연한 핵보유국이므로, 당당하게 그 행세를 하겠다는 것이다. 정말 착각도 유분수다.

2006년 10월 1차 핵실험 이후 북한은 지속적으로 핵보유국 지위와 핵 군축을 언급해왔다. 따라서 새로울 건 없지만 천안함 사건으로 6자회담 재개 전망이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나온 입장 표명이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천안함에 쏠린 국제사회의 관심에 물타기를 하면서 미국에 대화를 압박하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북한=핵보유국’이란 전제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에 이에 근거한 주장 또한 공허하다. 국제 정치 현실을 무시한 채 스스로 핵보유국이라고 계속 우기는 것은 낯뜨거운 자기 기만(欺瞞)일 뿐이다.

북한을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듯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의 ‘실언(失言)’에 고무됐는지 모르겠지만 미국의 공식 입장은 명확하다. 북 외무성 비망록이 나오던 날 게리 세이모어 백악관 대량살상무기(WMD) 담당 정책조정관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미국의 정책은 분명하다”고 못을 박았다. 필립 크롤리 국무부 공보담당차관보도 “미국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협상이 지연될수록 북한의 핵 무기고는 차곡차곡 불어날 것이고, 그러다 보면 결국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밖에서 핵 개발에 성공, 사실상의 핵보유국 지위를 획득한 인도나 파키스탄, 이스라엘처럼 될 수 있다고 북한은 믿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미국이 묵인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인도와 파키스탄은 양국 간의 특수관계 때문에 가능했음을 북한은 똑똑히 알아야 한다. 중국만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일본과 한국은 핵무기를 가질 수 없는 동북아의 역학 구조상 북한의 핵 보유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는 국제 정치의 냉엄한 현실이다. 북한이 3차 아니라 4차 핵실험을 하고, 핵탄두 수를 아무리 늘려도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는 결코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북한이 철저한 고립 속에 사실상의 ‘실패국가’로 전락, 백성의 주린 배조차 채워주지 못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핵무기가 체제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다는 미망(迷妄) 때문이다. 더구나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과 후계 체제 확립이라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자명(自明)하다. 하루 빨리 6자회담에 돌아와 정치·경제적으로 최대한 실익을 확보하고, 핵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이 체제를 유지하고 주민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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