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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내 생각은…

좋은 사전이 국가 경쟁력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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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사전 출판의 대명사인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부가 1884년 시작해 40여년 만에 완성한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포함한 100여 종의 자료들을 집대성해 유료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한 지 벌써 3년이 다 돼간다. 이 옥스퍼드 인터넷 사전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수록된 어휘(4400만)보다 세 배가 많고, 기존 웹상에서 서비스되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어휘(6000만)보다는 두 배가 많은 1억3000만 단어가 수록돼 있다. 그야말로 영어 사전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으며, 영어에 대해 궁금증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에 의존한다.

영국뿐 아니라 프랑스.러시아 등 소위 '소프트 파워 강국'들도 종류는 다르지만 시장성에 얽매이지 않고도 여러 가지 사전이 출판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을 해 다양한 사전이 나와 있다. 단어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뒤 알파벳순으로 재정렬한 역순 사전에서부터 빈도수 사전, 띄움말-붙임말 규범 사전, 욕설 사전, 희귀어 사전 등 그 종류를 일일이 셀 수도 없다. 또한 현실적으로 수요가 거의 없을 것 같은 외국어 사전도 몇 년 단위로 아주 훌륭한 증보판이나 새로운 형태의 사전을 편찬해 낸다.

세계 최대의 영어사전인 옥스퍼드 온라인 사전과 옛 소련의 사전 편찬 사례는 언어정책의 중요성을 인지한 국가적 지원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일반 가정이나 직장에서 작은 국어사전에서 백과사전에 이르기까지 사전 한 권 비치해놓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만큼 사전은 우리 생활에 가깝게 놓여 있다. 사전이 사전 편찬자들만이 아니라 당대 언중(言衆) 모두가 참여해 만들고 사용해야 하는 공기(公器)임이 틀림없는 이유다.

한국의 경우 비록 사회적 관심이 크지는 않지만 일본 강점기를 거치면서도 몇몇 선각자의 노력으로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마련되고 편찬작업 또한 중단되지 않았다. 또 최근에 와서는 사전 정보화 사업 차원에서 각종 다양한 유형의 사전(17세기 국어 사전.어원 사전.은어 사전.관용어 사전.발음 사전 등)이 만들어지고 전산화되고 있다.

하지만 외국어 사전, 이른바 이중어(二重語) 사전들은 아직도 냉엄한 시장의 논리 속에 영어와 같은 특정 외국어 중심의 사전 편찬 편중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한국이 국제화시대에 문화콘텐트 강국이 되기 위해선 특정국가 언어 중심의 사전출판 시장은 바뀌어야 하며 이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방러 결과 엄청난 양의 우주 과학 관련 자료와 연구 결과물들이 러시아에서 쏟아져 들어올 것이라고 한다. 비록 우리 측에서 영어로 번역된 형태로 요구했고, 러시아 측도 동의했다고 하지만 진정 가치 있는 1차 자료들은 러시아 원문 그대로일 것이고, 결국 관련 분야에 대한 번역작업이 진행돼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선진국들과 달리 우리는 이러한 자료 번역이나 그의 기초가 되는 특수어 관련 사전 편찬작업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이를 영어로 번역된 것을 통해 입수하는 2중적 구조에 만족하고 있다.

세계화.정보화를 기반으로 전개돼 가는 지식산업의 시대에 학술 분야의 국제적 협력은 국가 경쟁력과도 직결된다. 다른 나라가 축적하고 있는 정보와 지식의 가치를 판별하고 우리의 학문적 발전을 위해 활용하기 위해서는 1차 자료를 해득하기 위한 해당 외국어 능력을 갖춘 연구인력 양성과 사전 편찬이 선행돼야 한다.

특히 사전 편찬작업은 해당 외국어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있는 인력이 대규모로 참여하는 종합적인 성격의 사전을 1차적으로 만들고, 다시 그 사전을 토대로 전문가들이 참여해 세분화된 전문 분야 사전을 만드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믿는다. 1차 종합 사전 편찬 추진 과정을 처음부터 전산화할 경우 온라인 사전의 개발도 수월할 것이다. 온라인 사전은 신조어의 보완이나 주제별 사전 분류를 위한 기술적 지원이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일반 대중이 손쉽게 사전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런 사업을 국가가 주도해야 할 이유는 단지 사업규모의 방대함에만 있지 않다. 정보와 지식이 사적 소유물로 인정되는 시대에 외국어 사전은 지식과 정보의 빈부 격차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기능해야 한다.

국가경쟁력은 한 국가가 가진 재화를 국민 모두가 경제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때 극대화된다. 국가가 지원하고 국민 모두가 애정을 갖고 탄생된 사전이라면, 특히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꼭 필요한 사전이라면 국민 개개인이 각자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자원적 가치, 나아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할 문화적 콘텐트로서의 인문학적 가치를 지닐 것이기 때문이다. 혜안을 가진 정책입안자들이 국가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충분한 예산을 확보해 내실 있는 지원에 나서기를 바란다.

유학수 선문대 교수·언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