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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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금 DJ에게는 각계각층으로부터 '질문' 이 쏟아지고 있다. 정부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는 야당과 주요 신문은 물론 최근에는 사회원로.지식인.직능단체들까지 나서 질문을 퍼붓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가 지난 7월 이 정부하에서 실질적 법치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문제제기를 하더니 8월 들어서는 32인 성명, 1백15인 성명이 잇따라 나왔다.

평상시라면 각자 자기분야에서 자기생활에 전념할 이런 인사들이 이렇게 집단으로 의견을 표시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4, 5명이 점심 한번 먹는 자리를 만드는 일도 쉽지 않은 요즘 세상살이인데 흩어져 있는 몇십명, 1백여명이 사발통문을 돌리고 문안을 의논하고 공식발표까지 하는 일은 여간한 정성과 노력.결심이 없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도록 그들의 등을 민 것은 곧 그만큼 우리 사회의 상황이 심상찮다는 위기감이 아니었겠는가. 이런 원로들의 움직임에 이어 대학생 데모와 재미동포 지도층 시국성명도 있었다.

*** 집단 의견표시 부쩍 늘어

이들의 이런 의사표시 속에는 DJ와 정부에게 묻는 수많은 질문이 포함돼 있다. 가령 1백15인 성명은 혼자 독점하는 권력으로부터 나누는 권력으로의 일대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이 말엔 곧 "지금 권력은 나누는 권력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는 질문이 내포된 셈이다.

또 이 성명은 개혁을 하려면 자신부터 깨끗해져야 한다고도 했는데 이 말은 "부패를 단죄하는 사람들은 깨끗합니까, 지금의 개혁방식엔 문제가 없습니까" 라는 질문이나 마찬가지다. 1백15인은 "과거 반칙사회의 깊은 수렁에서 더럽혀진 우리 모두를 깨끗이 할 '홍제천(弘濟川)' 과 '대탕평(大蕩平)' 이 필요하다" 고 했다.

병자호란 때 끌려가 더럽혀진 부녀자들이 홍제천에서 씻고 나오면 과거를 불문에 부쳤다는 고사(故事)를 들어 과거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터에 미운 놈만 골라 과거의 먼지를 털어서야 되겠느냐, 다같이 반성.화합으로 나가야 한다. 이런 함의(含意)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32인 성명 역시 우리사회의 공론(公論)의 장(場)이 무너짐을 개탄하고 언론 탄압의혹을 질문하고 있다. 이들은 언론의 자성을 촉구하면서 아울러 MBC.KBS.YTN.연합뉴스 등 실질적으로 정부 지배하에 있는 매체들이 정부 입김에서 자유로워져야 함을 역설했으니 정부로선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아닌가.

DJ의 지난 8.15경축사는 그동안 제기된 이런 질문에 회답하는 내용이 될 것으로 많은 사람이 기대했다. 가령 그대들은 '흔들리는 나라' 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거나, '나누는 권력' 의 실현을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하겠다거나 하는 회답이 당연히 나왔어야 했다.

또 각계 인사들이 걱정한 우리 사회의 격렬한 갈등.분열, 적과 동지의 양극화 현상 등에 대해서도 대통령으로서의 인식과 처방을 밝히는 게 바람직했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문제들이 지금 나라의 최대 현안이요 난국수습의 중심 개념이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경축사에서 대통령의 시국인식과 난국타개 방안이 나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려온 게 아닌가.

DJ가 이런 질문에 답할 가장 적절한 기회를 그냥 넘긴 것은 실망이 아닐 수 없다. DJ 경축사에서 가장 비중있게 보도된 영수회담과 정치개혁도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굳이 경축사를 통해 제의하지 않아도 충분한 일이었다. DJ가 정말 영수회담과 정치개혁의 의지가 있었다면 정치권 내부에서 8.15 훨씬 전에 얼마든지 논의하고 실현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 회답없는 경축사에 실망

1백15인 성명이나 32인 성명 등으로 표출된 각계 각층의 심각한 우려의 무게와 중요성을 집권층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신중을 기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쏟아진 질문에 비해 경축사의 회답이 너무 소홀한 것을 보면 아마 따로 날을 잡아 충실한 회답을 보내기 위해 잠시 미룬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회답을 망설이고 있는 동안에도 질문은 계속 나오고 있다. 우리가 항공안전 2등국이라는 나라망신을 당했는데 책임은 누가 집니까, 평양축전 방북단 문제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영수회담은 진심입니까, 국정쇄신을 합니까 안합니까…. 질문이 나오면 즉시 즉시 답을 하는 것이 옳다. 늦출수록 부담이 커진다.

송진혁 <논설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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